쉼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다 

 

세월호 참사 2주기다. 지난달 세월호 참사 유가족분들이 광화문에서 삭발 투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故 유예은 양의 아버지는 이렇게 해야 기사라도 한 줄 나갈까 싶어,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싸움을 이어갔을 세월호 유가족을 보니 죄책감과 미안함이 밀려온다. 2년 전, 그리고 다시 1년 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나 역시 현재진행형인 유족들의 목소리를 흘러 넘긴 것은 아닐까.

 

다시, 세월호를 만나다

 

나에게 세월호는 2014년 겨울로도 기억된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할 때였다. 유가족 특별법이 의사상자 지정, 특례입학을 요구한다는 왜곡된 정보가 전해지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여러 대학을 방문하면서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학교 밖에서 간담회가 있었는데, 같은 수업을 듣던 학우가 세월호 유가족과 수업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강단에 유가족이 설 때부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물을지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예은 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가족이 감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예은 아빠는 특별법 제정에서 유가족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는지, 협의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정부와 대담을 하기를 원했으나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단원고 대학입학 특별전형은 유가족들이 원한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만나서 묻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 마디도 전할 수가 없었다.” 유가족들은 문서로도 국정원에 180여 건의 문건을 보냈지만 단 한 건의 회신도 받지 못했다. 언론 보도에서 잘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이후로 1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일이 미해결로 남아 있다. 청문회가 두 차례나 열렸지만, 책임 전가는 여전하다. 특별법 개정, 추모공간 마련 등의 약속은 줄줄이 번복되었다. 유가족들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시행되길 호소한다. 긴 싸움을 거치면서 이들은 점점 간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간절함에 비례해 유가족들의 슬픔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무리라는 여론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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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연대

 

‘떼쓴다’고 말하기 전에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소수의견’을 보면 처음에는 국가 폭력의 희생자였던 사람들에게 관심과 공감이 집중된다. 그러나 해결에 진전이 없고 국가 조직을 상대로 한 항소에 패하면서 그들은 소위 ‘급진적’이 라는 딱지가 붙고, 대중으로부터 소외된다. 어딘가 익숙한 줄거리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러한 전철을 밟을까 우려된다. 교실 문제만 봐도 그렇다. 당장 신입생을 받아야 하니 교실 10개를 추모공간으로 남겨두자는 것이 무리한 요구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교육청이 따로 추모공간을 만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소통이 부재했기에 불거진 문제다. 때론 배경이 생략되고, 무리한 주장이라는 인상만이 남는다.     

 

이러한 인상은 상당 부분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를 제한적으로 담는 언론 때문이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 사건을 뉴스로만 접했던 나는 유족들을 직접 만나거나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인상이 기사로 전해 듣는 것과 다르다고 느꼈다. 지금의 주장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 알게 된 후,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것부터가 연대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유가족과의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떠나는 여러 발걸음이 간담회 장소로 향했다.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상징물처럼, 세월호 참사 이후의 주장을 듣는 것도 작은 연대를 보태는 일이다. 세월호 2주기를 맞아 열리는 간담회, 그리고 청문회를 생중계로 전했던 대안 언론도 그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동하는 소수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건 듣는 다수가 있을 때다. 그것은 말하는 소수의 소외를 막는 일이기도 하다.

 

글. 가오나시(ay713@naver.com)

기획. 가오나시, 김연희, 샤미즈, 상습범, 압생트, 엑스, 이주형, 인디피그,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