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다

 

내 고교 시절은 교실이란 공간에 녹아있다. 나는 그 공간만큼의 사람을 접하고 이해했다. 물론 그렇다고 40명 학우 모두의 삶을 읽어내는 ‘공존’의 시간은 아니었다. 싸움이 만드는 권력관계, 축구가 만드는 권력관계, 남학생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에서 남자다움이 만드는 권력관계. 이것들은 40명의 공간을 몇 줄로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나는 좁은 공간의 교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생 때의 답답함은 대학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것 없이 계속되었다. 겹겹이 쌓인 건물들 사이로 붐비는 학생들, 그들을 가로질러 빼곡하게 들어찬 강의실에 옷깃을 스치며 비집고 들어가 앉아도 보이는 것은 앞사람의 등뿐이었다. 앞사람의 등과 뒷사람의 머리 사이, 양옆 사람의 팔꿈치 사이가 강의실에서 온전한 내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숨이 찼던 것은 단지 닫힌 창문 바깥을 가로막는 공사 중인 건물과 눈앞으로 보이는 수많은 등, 그리고 비좁은 강의실에서 수많은 사람이 내뱉는 이산화탄소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내게는 공간이 필요했다. 창문 바깥에는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닌 너른 운동장이 있어야 했다. 저 수많은 등 중에 몇몇은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 몇 마디를 걸어주는 이들이어야 했다. 고교 시절을 떠올렸다. 내 숨을 멎게 했던 ‘공간’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관계’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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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에둘러서 왔다. ‘세월호’ 사태 이후 2년간 내게 가장 많은 인상을 준 것은 공간의 문제들이었다. 그 대표인 광화문 광장은 참사에 공감하며 연대하는 이들이 찾고, 또한 희생자 유가족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물리적인 너른 공간과 연대한 이들이 보여준 ‘관계’의 공간을 광화문은 모두 상징한다. 막힌 숨을 틔워주는 공간.  그 곳을 채우는 것은 답답한 마음들이 함께하는 연대이며, 목소리, 이를 통한 회복이다. ‘자유로운 시민’의 연합이 구조에 목소리 내는 곳.

 

물론 이 공간이 회복과 연대 그리고 자유를 담지 하기에 이를 억압하기 위한 폭력 역시 광화문에서 일어났다. 추모집회 때면 국가 폭력이 있었고, 애도하며 단식을 진행하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피자 먹방’을 벌였다.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때로는 휴대전화 액정을 통해 추모와 애도의 공간이 재현되었고, 개중에 몇은 ‘우리’라는 관계의 공간을 분리시키며 ‘폭력시위’나 ‘떼쓰는’ 것으로 호도했다.

 

분리에 기초한 혐오에 대하여 너스바움은 ‘이것이 언제고 나와 다르며, 소위 ‘이상적 인간’의 가치에 해당치 않는 가치를 지닌, 역학관계 상 하부에 위치한 사람들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한 혐오, ‘유가족’이라는 타자에 대한 혐오, 정부라는 구조에 목소리 내는 개인에 대한 혐오, ‘우리’로서 분리에 거부한 이들을 향한 혐오가 세월호에는 얽혀있다.

 

‘물리적 광장과 관계의 공간’으로 행해지는 이 폭력과 혐오는 역설적으로 공간의 힘에 기인한다. 분리에 기초한 혐오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엮어내는 ‘관계의 공간’이고, 국가폭력에게는 개인들이 관계하는 광장이야말로 ‘악’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간에는 ‘우리’라는 감각을 다시 일으킬 힘이 있다. 때문에 단원고의 교실 존치를 둘러싼 논란은 그래서 좀 더 넓게, 깊게 다뤄져야 한다. 현실적인 여건들과 함께 추모와 애도라는 연대의 공간을 ‘학교’라는 공간 바깥으로 분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해야 한다.

 

참사를 겪으며,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게는 조금의 공간이 늘어났다. 광화문 광장을 자주 찾게 되었고, 때론 타인의 노란 리본을 보며 관계의 공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벽이 둘러싸인 곳에서 느끼는 갑갑함과 답답함이 가실 때, 우린 ‘삶’과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언제고 우리에게서 저 둘을 빼앗으려는 이들에게도 역시 목소리 낼 수 있으리라. 이에 고함20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세월호 2주기, 참사의 재현을 그저 ‘고통’의 재현으로 옮겨놓은 언론에는 ‘분리’에 대한 책임이 있다. 스팩터클이 된 고통에 대한 책임. 고함20을 포함한 언론이 할 수 있는 속죄는 하나다. 연대와 공간을 체현해 내는 것. 빼곡한 고층빌딩 사이에 광장을, ‘관계의 공간’을 다시 틔우는 일뿐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관계의 공간이다.

 

 

글. 압생트(9fifty@naver.com)

기획. 가오나시, 김연희, 샤미즈, 상습범, 압생트, 엑스, 이주형, 인디피그,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