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다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 제망매가. 월명사. 죽은 누이동생의 슬픔을 노래한 신라 향가

 

‘평생 글 쓰면서 살자’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글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글의 힘을 많이 믿고 있었는데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있더군요. 슬퍼도 그냥 슬픈 게 아니고 아파도 그냥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안산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의 큰누나 박보나입니다. 네. 성호는 희생자이고 저는 유가족입니다. 성호가 뭍 위로 올라온 날은 4월 23일 입니다.

 

요즘은 성호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성호와 있던 추억을 2014년에는 기억하려고 애썼고 2015년부터는 생각해내려고 애썼습니다. 성호와 함께했던 기억은 빠르게 사라지더라고요. 되뇌고 되짚지 않으면서 흘려보내던 매일의 일상들 하나하나가, 그때의 하루하루가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 생각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너무 힘들어서 성호가 없다는 것이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성호 생각이 나도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성호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지금도 성호가 희생자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를 유가족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나는 유가족입니다’ 라고 말해야만 하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어디에 나서서 얘기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발언도 하고 제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내가 유가족인 것을, 내가 희생자의 형제자매 신분인 것을 나에게 계속 주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일정이 있을 때마다 나가기 싫었습니다. 내가 나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나가면 공감해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매번 ‘하기 싫어’와 ‘그래도 해야 해’라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유가족은 언제부터인가 반공인이 됐습니다. 언론이 세월호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제 개인 페이스북에 사람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알리고 소식을 전하는 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메시지 받는 일이 많습니다. 매번 유가족으로서 어떤 행동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글과 사진을 올려야 하는지 올리지 말아야 하는지에 부담이 큽니다.

 

부모님들이 국회에서 첫 농성을 할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지지방문을 왔더군요. 그때 제가 유가족인 것이 실감 났습니다. ‘내가 왜 유가족 자리에 있지? 저렇게 돕는 자리가 아니라 당사자로 있지? 왜 내가 유가족이어야 하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같은 나라의 같은 20대인데 저는 유가족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50278-4

 

과거, 그리고 지금

 

사건이 있던 해에 저는 21살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듣고 배 속에 가만히 있다가 가라앉은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유가족을 비난하는 시선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서 숨어 지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내색을 보인 적 없습니다. 부모님에게는 더욱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형제자매는 그래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배에 품었던 엄마와 아빠의 슬픔이 한 가지에서 자고 나란 형제자매들 다는 당연히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의 형제자매는 250여 명 정도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 형제자매부터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형제자매까지 있어서 형제자매들의 나이 차이는 큽니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을 하는 형제자매도 있고, 은둔하는 형제자매도 있고, 애써 무시하는 형제자매도, 세월호의 ‘세’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형제자매도 있습니다. 각자 다른 시기에 마주한 슬픔을 각자 다른 모습의 슬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생된 아이들은 많은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가만히 있다 보면 내가 당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있기 두 달 전에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가 있었습니다. 성호 위로 저와 한 살 차이 나는 동생이 있는데 당시 동생은 20살이었습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갔던 부산외대 피해자 학생들이 제 동생과 동갑이라 내 동생한테도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자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고를 잊었습니다. 잊고 가만히 있었더니 저에게, 우리 가족에게 잊음은 세월호 침몰이라는 끔찍한 참사로 돌아왔습니다.

 

사건 후에 학교를 휴학하고 가족대책위 총무팀, 사이버 댓글수사팀, 416 TV 등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2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맡았네요. 세월호 사건을 조사하고 알리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세월호 사건을 알리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도요.

  

1년 휴학을 끝내고 복학을 했을 때는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듣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박보나는 누구였지? 뭘 좋아했지? 어떤 사람이었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유가족 박보나의 모습만 그려집니다. 박보나로서의 내가 제대로 서야 유가족 박보나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 텐데 유가족인 나와 박보나인 나 사이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네요.

 

앞으로 유가족인 나와 박보나인 나, 둘 다를 살아갈 제 인생은 제가 무엇을 하든 기준은 세월호 사건과 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별이 된 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 이 기사는 단원고 희생자  故 박성호 군의 큰누나 박보나 씨의 인터뷰를 재구성했습니다.

 

대표이미지. ⓒ 전북대신문

글. 김연희(injournalyh@naver.com)

기획. 가오나시, 김연희, 샤미즈, 상습범, 압생트, 엑스, 이주형, 인디피그,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