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나고 언론과 세상 사람들은 희생자와 희생자 부모의 이야기에만 주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 곁에는 항상 희생자의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 권오천 학생의 형 권오현 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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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자기소개 해주세요.

 

네, 저는 단원고 희생자 故 권오천의 형 권오현입니다. 사고 당시 제 나이는 28살이었고요. 제 가족은 세월호 침몰 8개월 전 간암을 판정받고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저, 여동생, 오천이를 포함해 총 다섯이었습니다. 저는 공연을 하고 곡을 쓰면서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고요.

 

사건이 일어난 직후 바로 가족대책위에서 활동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대책위가 만들어질 때 어떤 상황이었고 후에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가족대책위를 제가 처음 제안하고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건이 일어날 때 아버지가 안 계셔서 제가 오천이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의 ‘가족협의회’가 사단법인이 되기 전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생존자 가족대책위’였죠. 16일 故 박지영 승무원의 시신이 첫 구조자로 올라왔고, 오천이가 그날 밤, 16일 밤에 올라왔습니다. 오천이가 구조되고 우리 가족은 안산으로 올라와 오천이의 장례를 치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아직 구조되지 않은 오천이의 다른 친구들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고민 중에 안산에서 다른 15~20 정도의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서 임시로 가족대책위를 조직했죠.

 

준형이 아버지께 임시 초대위원장 자리에 대해 말씀드리려 고대병원을 갔는데 준형이와 장영이의 시신이 바뀌어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이가 바뀐 것을 염할 때까지도 모르다가 입관할 때 준형이 아버지께서 보니 준형이와 얼굴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그때야 DNA 조사하고 그랬죠. 그래서 제가 준형이 아버지 대신 가족대책위 서류들을 들고 중앙정부와 관련된 곳들을 다녔어요.

  

대책위를 세우고 나서는 일단 가족들이 대책위 안에 들어와야 하잖아요. 사건이 있고 안산과 안산 주변 수원, 화성, 시흥 등 꽉 찬 장례식장들을 다 돌았어요. 유가족분들에게 대책위를 설명해 드리면 ‘네, 알겠습니다’ 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아버님들께 멱살을 잡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신 예은이 아버님, 경근이 형님도 저에게 ‘xx, 너 누구야’ 이러시면서 제 멱살을 잡았죠. 그때는 유가족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이 가족을 못 믿는 상황이었고 유가족이 다른 유가족을 못 믿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었죠. 지금은 다 이해하고 사과하고 아버님들께 형님,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서로 많이 믿고 의지하고 있어요.

 

대책위 센터를 항상 지켰습니다. 저는 항상 사무실에 가서 앉아있었어요. 많은 부모님들이 다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도 버텨야 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전화가 하루에 1,000통이 넘게 걸려와 아침에 온 전화는 확인을 못 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부모님들이 조금씩 회복하시며 역할을 하나씩 맡으시며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로 저는 전체적인 회의를 준비하고, 회의 일정을 잡고, 회의록을 기록하고, 6월부터 있던 광주재판을 기록해서 가족원들에게 전달하는 등 세세하게 챙겨야 하는 일들을 주로 하고 있죠.

 

참사 이후 간담회도 많이 다니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의 왜곡 보도가 아닌, 유가족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고 싶어 유가족 개인이 1인 언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민 모임, 시민단체, 학교 어디든 갔죠. 모든 곳을 방문하기에는 활동하는 유가족 인원수가 한계가 있고, 또 부모님들은 지방일 경우 왔다 갔다 하는 거리가 멀면 집에 있는 다른 자식들을 챙겨주지 못해 제가 거의 지방에 살다시피 하며 간담회를 다녔습니다. 지금까지 간담회를 400번 가까이 다닌 것 같아요.

 

그렇게 14년과 15년이 지나가고 지금은 유가족의 형제자매들을 많이 챙기려고 노력합니다. 부모님들을 따라다니던 형제자매들을 한 두 번씩 만나면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형제자매는 조직도 아니고 대표도 없지만 제가 나이가 많다 보니 가운데에서 애들 밥 먹었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챙기고, 간담회에 같이 가볼까, 대학생 캠프 해볼까 제안하면서 일을 하고 있죠. 그 전에는 부모님의 입장에서 활동을 했으니까 이제는 형으로서 활동하고 있어요.

 

본인도 많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어른들을 이끌면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부모님들보다는 젊은 놈이 몸으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나보다 당연히 힘들겠지라는 생각에 부모님의 큰 슬픔 앞에 저의 작은 슬픔을 무시했던 것 같아요. ‘나는 버텨야 해. 엄마, 내 여동생이 힘드니까. 나도 물론 힘들지만 나는 버텨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 사건이 1~2년 안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했어요.

  

본업은 그만두신 건가요.

 

원래 하던 노래를 해보자는 생각이 잠깐 든 적이 있어서 홍대에 가서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전에 홍대에서 노래를 꽤 오래 해서 손님들은 제가 무슨 상황에 있는지 아시거든요. 그래서 중간에 노래가 끊겨도 이해해주시는데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직 여기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추모문화제에서는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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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형이 간다라는 도보를 하셨습니다.

 

네. 작년 11월과 12월에 도보했죠. 작년 도보 몇 개월 전에 페이스북을 통해서 ‘동생 시체 얼마야, 내가 살게’라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너무 화가 나서 평소에는 지나치는 그런 공격 메시지였는데 답장을 했어요. 내일 광화문 광장에서 만나자고, 돈 가져오면 오천이 유골함 주겠다고. 안 나오더라고요.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어요.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하기 위해 내가 행동을 한다. 그런데 너희는 키보드만 두드리잖아. 너희는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해본 적이 없을 거야. 나는 간다. 나는 안산에서 팽목항을 왕복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서 38일 걸렸네요. 많게는 30여 명의 시민 분들도 함께 걸어주시고 마중 나와주시고 그랬어요.

 

사고 이후 건강은 어떤가요

 

잠을 못 자요. 맨정신으로는 잠을 못 자니까 술에 취해 쓰러져야만 잠을 잘 수 있어요. 술에 취해 잠들어도 2시간 이내로 깨요. 그런 것이 매일 반복돼요. 아버지 중에는 한 달에 하루 정도 말고는 매일 5병 이상을 드시는 분들이 계세요. 약봉지를 2봉지 이하로 약을 드시는 분들이 없어요. 이가 빠지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트라우마로 폭식증이 왔어요. 예전 제 키와 몸무게가 178cm에 78kg이었는데 30kg이 순식간에 찌더라고요. 폭식증이 오고 나서는 잘 먹지 않아도 살이 찌고 손은 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었습니다. 구토 억제제를 먹지 않으면 자꾸 토하고. 지금도 폭식증이 있어요.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원래는 입원하라고 해요. 정혜신 정신과 박사는 중증이라고, 입원하지 않으면 장기가 다 망가진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지금 왜 그럴까요’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무의식중에 오천이는 지금 보지도 못하고, 뭘 먹지도 못하고,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인데 너는 지금 눈을 뜨고 뭔가를 먹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게워내는 그런 상황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동생과 어머니는 활동하시나요.

  

어머니는 대인기피증이 심하셔서 활동을 못 하시지만 제가 활동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세요. 동생과는 문제가 있어요. 여동생은 ‘언제까지 할 거냐’고 ‘오빠도 오빠 인생 살라’고 해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여동생은 슬픔을 속에 담으며 살아가고 나는 슬픔을 표출하며 살아가는…. 그렇게 다른 거니까요. 그래도 저도 사람인지라 여동생과는 말을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슬프거나 오천이가 보고 싶어서 힘든 감정표현은 어떻게 누구와 하나요.

 

사람들과 있을 때는 많이 내색 안 해요. 혼자 술을 마셔요. 사건이 있기 전에는 힘든 것도 잘 얘기하던 편이었는데 사건 후에는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인간관계가 정말 많이 줄었어요.

  

사고 당시 3년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광주재판 다니고 괴로워서 맨날 술 마시고 잠도 안 자고 활동만 하다 보니까 당연히 데이트를 못 하는 상황이었는데 만나는 시간이 적다 보니 여자친구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단지 5개월, 6개월 정도 지났을 뿐인데. 여자친구가 3년 동안 오찬이를 봤는데, 앞으로 함께 쭉 살자고 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핸드폰 연락처들을 보며 ‘그래 분명 이중에도 그만하라는 애들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또 충격을 받기 전에 제가 먼저 정리를 해야겠더라고요. 깊은 관계의 친구보다 얕은 관계의 친구가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은 세월호 활동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많이 연락하며 지네요.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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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아이들 수학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녀오셨는데 어땠나요.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어요. 이 땅덩어리에서 내가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 게 정말 싫더라고요. 제주도는 제주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토크콘서트를 하러 간 거였고요, 내려간 김에 아이들이 갔을 수학여행 일정으로 제주도를 돌아보려고 했어요,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왔으면 어디에서 어떤 자세로 사진을 찍고 즐거워했을까, 동생들의 눈이 돼서 다녀보고 싶었어요.

 

토크 콘서트에서 방청석에 앉아 있는 20살 제주도 친구들을 볼 때 많이 울컥했죠. 같이 간 형제자매 중에 저보다 어린 고등학생 친구들이 있어서 정신을 흩트릴 수 없어서 참았는데 혼자 여행지들을 돌다가 조현증이 왔어요. 산굼부리를 갔는데 안산 옆에 의왕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왔더라고요. 학생들이 먼저 알아보고 사진 찍자고 해서 사진을 찍는데 고등학생들만 할 수 있는 분위기로, 자세로 사진을 찍었는데 찍어주던 선생님이 사진기를 내려놓으니까 애들이 막 울기 시작하더라고요. ‘오빠, 저희가 다 오빠 동생들이에요. 힘내요’ 이러면서 애들이 울더라고요. 그때 무너졌죠.

 

‘내가 걸었던 저 길, 내가 지금 밟고 있는 땅, 내가 지금 딛고 있는 바로 그 보도블록을 오천이가 밟았을 거고, 렌터카를 몬 그 도로를 수학여행 버스가 지나갔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운전하면서도 많이 울고 걸어가면서도 많이 울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거울 보며 스스로 물어봤어요. ‘나는 지금 괜찮을까?’ 

 

집안에서 오천이의 빈자리를 느낄 때 언제인가요.

 

잘 때요. 같은 침대에서 잤어요.

 

우리는 오천이 사고 다음 달에 물품을 찾았으니 빨리 찾은 편이에요. 죽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이라든지 갖고 있던 물건을 태워주지 않으면 하늘로 못 올라간다고 해서 물품을 다 태웠는데 못 태우고 남겨둔 게 하나 있어요, 오천이가 수학여행 짐을 쌀 때 가방에 명찰을 넣고 갔더라고요, 그걸 베개에 올려놓고 자요.

 

그리고 오천이가 원래 자던 위치에 제 팔을 뻗고 자요. 혹시 아직 하늘로 가지 못했다면 잠깐 들렀다 가라고. 가위에 눌릴 때면, 가위가 의학적으로 설명되는 현상이라고 해도 ‘아 오천이가 왔다 갔구나’라고 생각해요.

 

정말 잘 풀려서 진실규명 책임자처벌 안전사회까지 된다면 원했던 모든 것이 다 끝난다면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나요

 

모든 것이 다 내가 생각 한데로 이루어져도 다시 완벽하게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오천이의 빈자리는 그대로니까. 완벽하게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고 마음껏 추모할 수 있을 거예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처럼요. 아버지는 돌아가신 이유가 간암으로 명확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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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저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일베도 그렇고 어버이연합도 그렇고 보수단체에 가끔은 고마워요. 우리가 뭔가 할 때 그 사람들 없으면 서운해요. 점점 광화문에 오는 사람들 줄어드는데 저 사람들이라도 모인 사람들이 와야 많아 보이잖아요 시끌시끌하고.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쳐다볼 테니까. 그리고 그 보수단체들도 우리에게 막 소리치고 목소리를 내는 게 어쨌든 4월 16일에 죽어가던 아이들이든 누군가의 부모들이든 그 사람들 머릿속에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죠.

  

정말 무서운 건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세월호가 정말 없구나. 이렇게 없어지는구나’라고 생각돼요.

  

저는 우리와 함께해달라, 행동해달라, 서명해달라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거 하나도 안 해도 되니 그냥 머릿속에 오천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억한다면 반사적으로 무슨 행동이든 나올 거에요. 기억한다는 건 굳이 노력하지 않고, 보고 듣기만 해도 머릿속에 남는 거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잊히는 것도 가장 쉬운 것 같아요. 계속 떠올려 주세요. 잊히지 않게.

 

글. 김연희(injournalyh@naver.com)

기획. 가오나시, 김연희, 샤미즈, 상습범, 압생트, 엑스, 이주형, 인디피그,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