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을 이분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한 이분법은 ‘배려’라는 가면을 쓰지만 때론 폭력이 되기도 한다.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숫자로 분류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경계를 허무는 글을 쓰기로 했다.

 

*  장애인의 날을 맞아 기사를 읽기 힘든 분을 위해 청각뉴스를 제공합니다. 주변에 이 기사를 전해주고 싶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함께 읽고, 들어주세요. 

 

2010년 나는 고3이었다. 그해 초, 지금은 종영된 토크쇼에 모 연예인이 출연해 척수염을 앓았던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게 마치 복선이라도 된 듯 같은 해 8월, 나는 척수염에 걸렸다. 재활치료는 11월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 연예인의 딱한 사연에 감동을 하였는지 그날 토크쇼는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었다’는 어떤 시처럼 척수염은 그 연예인에 의해 내뱉어진 순간에만 의미가 있었다.

 

척수염은 원인도, 확실한 치료법도 없었다

 

척수염은 척수 부분에 감염이 생겨 신경 이상, 마비 등의 증상을 보이는 난치성 질환이다. 나는 뒷목이 디스크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프다가 손, 발이 저리더니 2주 만에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염증이 식도를 압박해 음식조차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같은 척수염이라도 내 병은 살면서 몇 번이고 재발할 수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재발은 목 부분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허리 쪽으로 올 수도 있고 시신경에 생겨 실명이 될 수도 있으며 신체 전 부분에 다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다. 재활치료를 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지만 마비된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척수염 환자는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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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염을 예방하기 위해 맞는 면역억제액.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40만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었다

 

고통, 마비 증세에 대한 두려움, 재발의 위험. 처음부터 끝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무관심과 무지였다. 몇 가지 단상을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의미에서 푸는 썰이 아니다. 당신이 모르는 어떤 삶에 대해 당신도 모르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다.

 

지방 병원의 한 신경외과 의사는 마비된 내 왼팔을 보고 “고3이라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으니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했다. 정신병원에서 상담을 받는 사이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다리까지 마비됐다. 병을 치료해야 할 의사가 뱉은 무지의 소산 때문에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척수염 환우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난치성 질환에 대해 학계에서 충분히 공부하고 환자를 대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다른 환자들의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신경과에서 재활치료 병동으로 자리를 옮기자, 병동 특성상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비교적 어린 난 회복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랐고 영구적인 장애가 아니었기에 꾸준한 치료로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것 정도는 가능한 상태가 됐다. 그걸 보고 보호자나 간병인들은 불편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엄마랑 얘기하며 웃기만 해도 “누군 아파 죽겠는데 넌 웃니”라고 하거나 “멀쩡한데 집에 가지 왜 돈 낭비냐” 등의 말을 툭 던졌다. 재활치료를 받던 아저씨가 던진 성희롱적 발언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이분화된 세상에서 일 년에 몇 달 못 움직일 뿐인 나는 상대적으로 속 편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더 불쌍한 사람이 됐고 거기에 토를 달면 나만 이상한 애가 되는 거였다.

 

병원 밖을 나선 후에도 이 ‘낯선 병명’은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다. 내가 입학한 대학은 “장애 학생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의 문구를 강의 계획서마다 프린트해 놓았다. 재발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내원해 다섯 시간짜리 링거를 맞아야 했던 나에게 공결처리만 인정해 줬어도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지 모른다. 대학 내 각종 술자리 문화는 내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발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에 술은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생활’ 을 운운했고, 척수염이 뭔진 모르겠지만 ‘너 참 싸가지 없다’는 식의 말과 눈빛으로 나를 대했다. 난 마지못해 술을 마셨고 그해 겨울 허리 쪽에 재발이 되어 한동안 두 다리를 쓸 수 없었다.

 

병에 걸려도 환자 걱정보단 우리 부모님 걱정부터 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받는다. 나쁜 의도는 없겠지만 알게 모르게 스스로 등골브레이커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흔히 ‘투병’이라는 말을 하지만 난 병과 싸운 게 아니라 무관심과 외로움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그러니 이제는, 되도록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을 극복하라는 걸까?

 

입원 당시, 교회 언니가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선물했다. 그 책은 이지선 씨가 겪은 투병과 신앙 형성의 과정을 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평생 지선이가 될 수 없고 그녀가 되고 싶은 욕망조차 없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당당히 마주 보며 매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인생은 눈에 보이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버겁다. 하물며 내 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엇을 마주 봐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엔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도 망각하며 살고 있고 사회에선 최소한의 배려조차 안 하는데 무언가를 극복하라는 말은 공허하게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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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운전을 했던 누군가의 실수로 교통사고가 났고 당시 차에서 나오지 못한 이지선 씨. 이지선 씨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 ⓒ 문학동네

 

멀쩡한 다리로 땅을 밟고,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여행까지 자유롭게 다녔던 나는 이제 이 당연한 것들에 황송함을 느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지면서 재발의 횟수는 더 많아질 테고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신체기관이 망가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줬다 뺐기 식으로 회복시켰다 다시 모든 일상을 앗아가는 병. 그런 병과 평생 살면서 느껴야 할 건 감사함보단 허무함이 아닐까?

 

항체검사 수치에 연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의료보험만 비켜간 병원비를 감당하는 부모님 앞에 당당하지도 못하다. 내가 극복해야 하는 건, 그러니까 긍정의 힘으로 딛고 일어나야 할 건 몇 가지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긍정의 힘만으로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글. 샤미즈 (ndhhdm90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