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세상?] “5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노래가 끝나면 기분이 이상했다. ‘5월’이 아니면 ‘우리들’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우리들 세상. 우리들 세상. 우리들 세상이라고? 나는 마침표를 빼고 물음표를 넣고 싶었다.

 

습관이 좀 더 무서웠으면 할 때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습관처럼 챙기던 실내화 주머니를 집에 두고 왔을 때의 얘기다. 당시엔 운동화나 구두와 같은 실외화를 신고 교실을 들어갈 수 없었다. 실내화를 깜박하고 집에 놓고 온 날이면 신고 갔던 운동화를 벗고 양말만 신은 채 교실로 향해야 했다. 먼지로 인해 까매진 발바닥은 기본이요, 잠깐 방심하면 나무 바닥의 가시가 박혔다. 점심시간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찝찝한 액체로 발이 젖었고 집에 갈 때쯤이면 양말은 쓰레기통을 향했다.

 

그러나 몇몇 선생님과 학부모는 학창 시절의 나와 달리 굳이 실내화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흙먼지가 묻은 구두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무려 ‘중앙현관’으로 당당히 드나들었다. 중앙현관 근처만 가도 ‘중앙현관으로 드나들지 말거라’라는 교장선생님의 외침이 울리는 것 같던 나로선 중앙현관을 드나드는 그들을 보며 경외감을 느꼈다. ‘아, 중앙현관은 19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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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 오마이뉴스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이유로 혼날 게 점차 늘었다. 연애는 물론이요, 결혼에 애까지 낳은 선생님이 고작 연애를 하는 우릴 두고 풍기문란이라며 혼냈다. 아무리 추워도 사복은 금지였고,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이란 단어는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중학교 때부터 고3까지 공부보단 학생주임의 머리 단속을 피하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1년에 한 번 정도만(?) 옆머리를 밀면 됐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초·중·고 시절 우리에게 가해진 규제를 반추해보면 불합리한 경우가 대다수다. 학생이 실내화를 안 신거나 중앙현관으로 드나든다고 해서 학교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학생이 연애를 한다고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도 아니며, 머리를 밀고 저녁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도 성적이 꼭 향상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눈치껏 행동했다.

 

이 불합리한 학칙이 용인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라는 근본 없는 당위 때문일 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으로 ‘학생다움’을 규정하는 건 ‘남자는 울면 안 돼, 여자는 요리를 잘해야 해’라는 말만큼이나 근본이 없다. ‘성인’이란 자격이 학생에게 ‘학생다움’을 강요할 수 있는 권리인 것도 아니고, 우리는 ‘학생다움’에 대해 일관된 합의를 내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여자는 요리를 잘해야 해’라는 당위가 편견에 따른 차별과 억압의 결과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학생다움’을 이유로 학생을 옥죄는 것 역시 차별과 억압에 따른 근본 없는 당위임을 유추할 수 있다. ‘남성다움’, ‘여성다움’, ‘학생다움’ 등은 대개 개인을 옥죄는 사회적 코르셋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코르셋을 비집고 나오는 행위는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남자가 우는 게 비정상이 아니고, 여자가 요리를 못해도 비정상이 아니듯 학생이 공부를 안 하고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그들이 비정상인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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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수나로

 

선생님께 드리는 가정통신문, “실내화 여분 좀 챙겨주세요”

 

물론 청소년보호법의 취지에 따라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청소년을 유해한 매체와 약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어느 정도는 있다. 물론 ‘건전한 인격체’ 앞의 ‘건전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불분명하지만, 청소년의 가치관 형성과 신체 성장은 출생 이후 10년 이상의 시간을 담보로 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학생에게 요구하는 공부에 대한 강요나 두발 길이의 제한 등이 정말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걸까.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규율은 개인을 권력행사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삼는 권력의 특수한 기술이다”라고 푸코는 서술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만든 규율을 통해 개인의 주체성은 박탈되고, 개인은 권력에 의해 조작되는 수단적 신체가 된다는 의미다. 쉽게 표현하자면, 규율을 거쳐 규범화된 인간은 주체성 있는 개인이라기보단 권력의 요구에 맞게 돌아가는 기계에 가까워진다. 푸코는 규율에 의한 권력행사의 장소로 감옥, 군대, 작업장 등 몇 가지 예시를 들었다. 그 예시 중 하나가 학교다.

 

청소년보호법에서 말했듯, 학교가 요구하는 규율 중 몇몇은 ‘건전한 인격체’로서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윤리 교육을 이행하거나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대한 기본적 교육을 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렇다면 실내화가 없다고 맨발로 하루를 보내게 하거나, 연애를 금지하고, 머리를 강제로 자르게 하는 규율은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생의 ‘보호’를 위한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건전한 인격체로서의 성장에 맨발 수행이나, 비연애, 짧은 머리가 필요하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엔 실내화를 교실에 놓고 다니는 학교가 많고 교실 바닥도 전보다 안전한 재질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처럼 맨발로 다니다 찝찝한 액체를 밟거나 가시에 찔릴 가능성은 적어진 거다. 그런데 뭐, 이제 신체의 한 토막인 발과 관련된 문제만 해결됐을 뿐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발 위로는 여전히 해결될 것들이 많아 보인다.

 

대표이미지. ⓒ 연합뉴스

글. 콘파냐(gomgman32@naver.com)

[우리들세상?] 기획. 엑스, 인디피그, 압셍트, 콘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