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세상?] “5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노래가 끝나면 기분이 이상했다. ‘5월’이 아니면 ‘우리들’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우리들 세상. 우리들 세상. 우리들 세상이라고? 나는 마침표를 빼고 물음표를 넣고 싶었다.

 

영화 ‘4등’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어린 몸에 가하는 폭력의 방향을 짚어낸다. 작품 속에서는 금, 은, 동메달을 위해 매를 드는 코치와 금, 은, 동메달을 위해 이를 모른 체하는 부모의 모습이 나타난다. 폭력의 그 너머에 ‘금, 은, 동’이라는 물질이 자리 잡은 점에서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올리버가 당한 그것과도 닿아있지만, 영화 ‘4등’에서 행해지는 폭력에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 보인다. 어린이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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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등’

 

사실 이 믿음은 매우 새로운 것이다. 다른 어린 몸들, 각각 19세기 영국의 초기 자본주의와 1921년 미국의 경제부흥기(Roaring Twenties)를 배경으로 하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와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의 어린 몸에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투사되는, 꿈과 미래를  담지한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다.

 

발명된 오늘날의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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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리버트위스트’ 

 

올리버는 어린이 보다는 착취당하는 노동자에 가깝고,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가 보여주는 1921의 아이들은 가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이거나 거리의 부랑자다. 이들을 ‘어린이답지’ 않게 만드는 것은 수행하는 업무 그 자체보다 그들의 세계가 재현하는 일상성이다. 가업을 돕는 아이는 그저 관성적인 듯 잔업을 수행하고, 경찰은 부랑하는 아이들을 ‘교육을 통해 선도해야 할 이’가 아닌 다른 수많은 부랑자 중 하나로서 대한다. 반면, ‘4등’의 준호가 착취당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에 투사된 ‘어린이’라는 특수성이다. 꿈과 미래 그리고 새 나라의 어린이.

 

이는 ‘어린이’라는 개념이 매우 근대적이라는 것을, ‘나이’와 같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꿈과 희망, 새 나라의 어린이’는 실제로 어린 몸이 타자의 요구에 의해 끊임없이 호명되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아이는 1900년대 초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가 소망하는 ‘새나라’, ‘새시대’ 그 자체이기도, 독재정권의 투박한 이미지를 세탁할 ‘새세대’로서 ‘육영’ 되는 순수라는 표백제이기도 했다. 육영은 박정희의 ‘육영재단’을, 새세대는 전두환의 ‘새세대재단’을 가리킨다. 1960년대 우량아 선발대회와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문장은 ‘잘 먹고 잘살기’라는 미명 아래 삶의 다른 가치에 대한 고민을 묵살한 박정희식 발전주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에 접어들며 오늘날 어린이는 유예된 사회의 꿈을 받아내는 공간이며, 한편으로는 꿈을 사회로부터 거절당하는 시기이다. ‘절망’의 시기일수록 독재자, 기업, 이데올로기는 계속해 ‘꿈’과 ‘미래’라는 희망을 어린이에게 투사하고, ‘어린 몸’은 동등한 주체라기보다는 부유물을 담는 그릇이, 대상이 되어간다.

 

 준호의 해방과 같은 그늘 속의 청년, 여성의 해방

 

가부장제에선 여성이, 세대주의에서는 청년이, 어린이 담론에서는 어린 몸이 이와 같은 그릇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체제에서 실현 불가능한 계급적 문제들, 불평등의 문제들, 부정의의 문제들로 인한 부유물을 담아낸다. 놀라운 것은 어린이 담론의 전유를 설명하며 예시로 들었던 민족주의, 독재자, 자본과 신자유주의는 ‘여성’과 ‘청년’이 전유 되는 방식, 억압되고 타자화되는 과정들에서도 변곡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패기 청년과 포기 청년. 성녀와 창녀. 꿈과 희망의 어린이와 어리석은 이로서의 ‘어린이’. 신화화와 혐오 둘뿐인 이들에 대한 재현의 이분화는 오직 ‘타자’로서 존재해 왔던 여성, 청년, 어린이의 담론 지형을 보인다. 영화 ‘4등’ 역시 타자로서의 ‘어린이 담론’ 지형을 차근히 조망해나가다, 순간 레일 걷힌 수영장을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을 비춘다. 나는 그 생경함과 강렬한 이미지를 기억한다. 직선의 레일이 상징하는 것은 수영장이라는 공간에 경쟁, 등수, 금은동이라는 물질 등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획이 그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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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등’ 

 

그것을 치워버린 곳에서 수영하는 아이의 행복은 단순 ‘극성의 교육열’에서의 해방은 아닐 것이다. 3포 세대와 88만 원 세대 등의 청년 세대론을 비판하는 청년의 주장 역시 단순 ‘꼰대질에 대한 비아냥’이 아니고, 여성주의의 그것도 ‘여성 대 남성’이라는 성별 환원적인 갈등이 아니다. 어린이, 그리고 같은 그늘 속에서 타자화된 이들의 목소리는 그 과정에서의 역사성에 대한 질문이고, 그들을 대상화시킨 메커니즘을 향한 저항이다. 그 메커니즘은 부분이 아닌 핵심 장치다. 때문에 어린이, 청년, 여성의 해방이란 그 바깥의 이들에게도 구원인 것이다.

 

대표이미지. ⓒ 영화 ‘4등’

글. 압생트(9fifty@naver.com)

기획. 압생트, 엑스, 콘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