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숱한 논란을 거치며 ‘여성혐오’라는 언어가 보편화 됐다. 여성을 향한 억압과 폭력 뒤편에 있는 정서를 설명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그 이후, ‘여성혐오’는 문화 콘텐츠와 일상에서의 부당함과 그릇됨을 설명하는 언어로 기능해 왔다. 그리고 지난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에게 무시당했다’는 가해자의 범행 동기는 억압당하는 여성의 현실과 여성에 대한 만연한 혐오적 정서, ‘여성혐오’라는 언어의 탄생 등의 배경과 결합했다. 이는 많은 이들이 해당 사건을 ‘여성혐오’적 범죄로 명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표현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여성혐오’가 극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얽히게 된 것이다.

 

여성을 향한 혐오적 정서와 표현이 실제 극단적인 폭력과 함께 읽히는 중이지만, 여전히 한국 정부와 제도의 ‘혐오적 표현’을 향한 대처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혐오에 관해 꾸준한 연구를 해온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도 지난해 논문을 통해 국가의 무대처가 “혐오표현을 ‘허용’하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줌으로써 혐오표현의 피해자에 대한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비개입이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만연한 혐오적 정서가 극단적인 사건의 원인으로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이번 강남에서와 같은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사전 조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떤 방법으로 ‘혐오표현’ 규제에 개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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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과 차별적 표현에 대한 국가의 개입 방안은 네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표현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입장이다. 규제를 전면 거부하며, 내부에서 혐오 발언에 맞받아치는 담론을 통해 혐오표현을 극복하자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규제를 인정하고 이것을 ‘민사적 제제 형식’을 용인해 혐오를 규제하자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보다 엄중한 ‘형사적 규제’를 통해 통제하자는 입장이고, 네 번째 방안은 강제적(법리적) 규제가 아닌 조정과 중재를 통한 자율적 분쟁해결 방식이다.

 

‘규제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전부일 것 같지만, 이처럼 방식이 나뉘는 것은 ‘표현에 대한 규제’가 지닐 수 있는 위험 때문이다. 특히 한국처럼 언론 등의 매체가 통제되고, SNS,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까지 사찰당하는 현실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제도화된 법이 국가에 의해 악용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형사적 규제를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위법인 ‘혐오 표현’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상과 범위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 가지 방법 중 지난해 서울대에서 열린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책’ 세미나에서 형사범죄화의 제한적 허용을 주장한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와 완전한 비-형사범죄화를 주장한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의 방안을 살펴보자.

 

이것은 혐오표현 ‘관용’이냐 ‘대응’이냐 문제가 아니다.

 

김지혜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사범죄화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제한적인 형태로의 형사범죄화를 주장한다. 혐오표현은 ‘조직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권위’가 있는 이들로부터 소수자를 향하기에 민사적, 혹은 자율적 대응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다. 또한 형사범죄적 규제는 독단이 아닌 다른 행정적 조치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홍성수 교수는 이와 같은 형사범죄화를 이용한 규제가 일관되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고, 오용의 위험으로 규제 범위를 좁히면 실제 처벌 사례가 매우 적어 비효율적이게 되는 아이러니에 직면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그는 “범죄자 처벌”이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의 ‘구제’를 주장하며, 사전 혐오 표현의 ‘예방’을 위해 차별시정기구를 통한 국가의 개입을 제안한다.

 

위 두 교수는 형사범죄화, 비형사범죄화에 있어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적극적 규제냐 최소의 규제냐는 이 논쟁은 흔히 혐오표현에 광범위한 규제(extensive regulation)를 실시하는 유럽식 제도와 최소 규제(minimal regulation)를 실시하는 미국식 제도 간의 논쟁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둘 사이가 마냥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지적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혐오표현을 방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국가에서 혐오표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규제(법에 의한 강제 규제 vs 사회에 의한 규제)할지에 대한 것이지, 혐오표현을 관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표현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대처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 홍성수의 과거 한겨레21에 연재 글의 일부

 

두 입장은 규제의 방식이 다를 뿐 ‘대처’라는 것의 필요성은 둘 다 인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를 읽을 수 있다. 두 입장 모두 신호를 요구한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도 역시 신호다. 국가가 이와 같은 혐오표현에 불관용 하겠다는 신호. 여성을 향한 극단 범죄에서, 다수가 여성혐오를 읽어내는 현상은 다시금 ‘여성 혐오’의 만연함을 환기시킨다. 규제는 언제까지 ‘형식적’ 표현의 자유에만 머물 것인가.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