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 A 씨가 살해당했다. 새벽 1시 강남의 ‘번화가’에서. 살해 동기는 다음과 같았다. ‘여성이 나를 무시한다.’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 사건이었다. 많은 여성이, 그 자리에 피해자가 아닌 자신이 있었다면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남성 몇몇도 자신 역시 잠재적 가해자임을 밝히며 반성과 성찰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던진다.  고함20의 [젠더 에세이]는 그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살女달라는 자 A

 

애인과 만나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얼굴에 그늘이 잔뜩 져서 나타났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한 할아버지가 이유 없이 젊은 여성을 때렸단다. 지켜보다 화가 나서 할아버지와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말했다. 그런 일 아주 자주까진 아니지만 꽤 흔해. 괜히 따졌다가 되레 욕먹거나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냥 참는 거지. ‘꽤 흔해’란 말에 놀란 건지 그는 나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나도 여잔데.“

 

남자친구는 충격받았고, 나는 그 충격이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분명 같은 버스에 오르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길을 걸을 텐데, 각자가 경험하는 반쪽짜리 세상은 왜 이리 다른지.

 

당장 애인과 만났던 그 거리에서도, 나는 비슷한 일을 겪었다. 언니랑 같이 길을 걷던 중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저씨가 언니의 머리를 때렸다. “퍽!” 소리가 하도 크길래 처음엔 길에 있는 전봇대에 부딪힌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별안간 욕지거리가 따라왔다. “창녀 같은 년들!” 백화점 앞 번화가에서, 대낮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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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int Hoax

 

여성이 더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단순히 힘의 차이일까. 남녀의 물리력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더 쉽게 폭력을 당하는 것을 물리력 차이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그건 여성이 ‘만만하기’ 때문이다. 만만하다는 건, 여성을 나(남성)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우리 언니 머리를 때린 그 아저씨가, 짧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젊은 여성은 당연히 자신이 함부로 때려도 될, 훈계해야 마땅한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하니까,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도 떳떳하기 힘들다. 여성들에게 밤길은 원래 무서웠다. 늦은 시간에 친구들에게서 오는 전화의 상당수는, “야 나 버스 내림”으로 시작한다. 집에 갈 때까지 통화를 해달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우리는 알아듣는다. 이 반쪽의 삶을, 저들은 모를 것이다. 밤길을 걸을 때마다 습관처럼 이어폰 한쪽을 빼는 것도, 당연스럽게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상상을 하는 것도, 그 상상의 종착점은 피해자가 된 나에게 가해질 또 다른 폭력( ‘오늘 내 옷차림이 문제가 될까? 늦은 밤에 술 먹고 다녔다고 욕을 먹을까?’)이라는 것도 알지 못할 테다.

 

밤길이 두렵다고 하자, 남자친구는 “지켜줄게”라고 말했다. 한집에 사는 아빠는 밤마다 역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안다. 그들은 정말로 나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그들의 틀 안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한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보호가 아닌 남성들의 공감과 연대다. 무엇이 여성들을 공포로 밀어 넣었는지 이해하고, 여성혐오 문화에 같이 맞서겠노라 다짐하는 것이다. “지켜줄게”는 필요 없다. “함께 싸울게”를 간절히 원한다.

 

#살아男은 자 A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여자친구를 사귀던 당시 밤길이나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불안해하던 여자친구에게 빈번히 읊던 대사다. 나의 구린 과거를 이렇게 털어놓는 게 다소 부끄럽긴 하지만, 당시엔 이 말이 진심이기도 했다. 초등학교-남중-공학을 거치는 동안 꼭 뒷자리에 앉아야만 했던 키와 덩치였고, 해코지를 당한 기억보단 반대의 기억이 더 빈번했다. 누군가를 지켜주면 지켜줬지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당할 거라는 건 머릿속에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지켜줄게’란 말과 작별했다. 그리고 모든 남성이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지켜줄게’란 말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혹은 1등 시민이 2등 시민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며 그 면면을 자세히 뜯어 보면 ‘호의’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포장된 여성혐오다. 내가 이 말을 여자친구에게 하는 매 순간 나와 여자친구 사이의 부조리한 젠더 위계는 공고해진다. 이 불필요한 ‘호의’가 계속되는 한 여성은 여전히 아랫사람으로, 2등 시민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대개 범죄를 일으키려는 가해자로부터의 물리적 보호를 이야기할 때가 많다. 이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할 만한 물리적 힘을 가졌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가 되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성의 물리적 힘이 ‘보호’로 기능하는 건 보호받는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에 머무를 때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난 여성에게는 ‘보호’로 기능하던 물리적 힘이 언제든 ‘공격’으로 뒤바뀔 수 있다. ‘여자들이 날 무시했다’란 망상이 살인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1등 시민은 2등 시민의 ‘하극상’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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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된 여성 살해 사건 중, 배우자와 애인으로부터 살해된 경우가 79%다. 지켜준다고?

ⓒ 한국여성의전화

 

그래서 난 살아男았다. 나는 기득권을 숨 쉬듯 누리고 있는 1등 시민이기에 누군가로부터 굳이 ‘지켜줄게’란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반면 여성은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맞고, 죽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남성의 태도는 ‘우리를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지 말라’는 분노가 아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그에 기반한 공감과 연대다. 그래야만 특정 성별이 특정 성별을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다. 계속해서 여성을 지켜줘야 할 존재로 여기는 한 ‘살女주세요’란 말은, 그리고 ‘살아男았다’란 말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대표이미지. ⓒ 뉴스1

글. 달래, 콘파냐

편집. 콘파냐(gomgman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