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다시 ‘진짜’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도 역시 여성혐오는 ‘진짜’ 문제가 아니란다. 그들은 여성주의자들과 여성들이 왜 계급과 계층, 그리고 정신질환이라는 요소를 고려치 않느냐고 묻는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무수한 포스트잇이 ‘진짜 문제를 모른다’는 식이다.

 

이러한 ‘충고’에는 때론 멸시의 뉘앙스가 담긴다. 소름 끼치고 우스운 일이다. 이 문제를 ‘여성혐오’ 범죄로 이름 붙인 사람들이 다른 요인을 고려치 않았다고 쉽게 단정하는 것 말이다.

 

‘진짜’ 문제, ‘진짜’ 투쟁?

 

다른 문제들에서도 비슷한 ‘진짜’론을 볼 수 있다. 학생사회는 다 죽었다며, ‘그것은 진짜 투쟁이 아니다’라고 충고하는 그들, ‘그것은 진짜 꿈이 아니다’라며 내 꿈을 나무랐던 선생님, ‘여성혐오는 진짜 문제가 아니다’는 당신.

 

물론 그들의 충고가 무용하지는 않다. 허나, 계도적으로 타자의 무지를 상정하고 던지는 충고는 우스울 뿐이다. 더불어 이런 비난들은 대체로 지향점으로 멀리 떨어진 채 미화된 과거나 소위 ‘진리’, ‘이상’, ‘진실’만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곳에 정착해 축적된 변화, 상황, 맥락 등을 경유치 않는다. 그 맥락은 축적된 여성을 향한 억압이기도 하고, 대학의 신자유주의화이기도 하고, 삼포’세대’라는 표상 뒤에 존재하는 세대 내 불평등이기도 하다. 당신의 충고가 맥락적 지점들을 경유하여 오늘의 운동에서 의미를 찾고 교차를 시도할 때 ‘진실’, ‘진리’, ‘이상’은 한 발짝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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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추모는 아니다 ⓒ 오마이뉴스, 김예지

 

진짜론은 보지 않는 것들

 

헌데, 여전히 ‘그(he)들’은 그저 가르치려 만 할 뿐이다. 애도와 승화된 운동의 치열함을 보지 못하는 당신은 ‘우리가 뭘 모른다’는 말을 쉬이 던진다. 우리가 보기엔 당신이야말로 뭘 모른다. ‘대중’, ‘여성’에 멸시 가득한 당신의 충고가 모르는 것은 치열한 헤게모니 투쟁 앞에서의 부끄러움이다.

 

해당 사안을 ‘여성혐오’만으로 단언하는 것이 너무도 본질주의적인 태도라고, 다른 변인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에 (백번 양보해) 일면 동의한다. 대신 본질주의가 아닌 ‘전략적 본질주의’라고 정정하겠다. 당신은 ‘민족주의’식 본질주의로 읽고 있지는 않은가. 과거 대항담론으로 유효했던 민족주의가 탈식민 이후 지배이데올로기로 바뀌며 가져온 부조리들, 민족 내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들, 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은 분명 문제였다. 그래서 여성주의가 민족주의와 같은 본질주의라고? 그래서 그런 본질주의는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전략적 본질주의를 제시한 스피박이 노할 일이다. 전략적 본질주의는 본질과 해체가 교차하며 다원성과 힘을 모을 수 있는 운동이 교차한다. 여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다르게 ‘구성’과 ‘해체’에 뿌리를 두고, ‘전략적’으로 본질주의를 택한다. 이처럼 ‘여성’, 혹은 ‘여성주의’가 민족주의처럼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본질주의적인 폭력들을 낳을 징후는 찾기 힘들지만, 백한 번 양보하여 당신의 말을 귀담아듣겠다. 물론, 많은 연구자들이 이미 운동과 함께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연대하는 중이지만.

 

논의를 따라잡고 공감하려는 의지. 때론 말을 삼가는 것이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이 문제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이란 매우 모호해서 정말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탐색하는 당신의 말을 존중하고 싶다. 그래서 진실의 빈공간은 남겨두었다. 대신, 나는 이것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선택’했다. 모호하기만 한 본질의 영역에서 결국 이것이 ‘여성혐오’가 아닐지라도, 이를 여성혐오로 읽고 연대하는 행위가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생각지 않는다.

 

강남역 ‘여성혐오’ 범죄의 운동은 양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하나는 당신이 말하듯 이 사태에서 ‘여성혐오’의 위치를 구분해내는 진실의 영역, 나머지 하나는 ‘여성혐오’는 이제 용납할 수 없다는 움직임과 이를 통한 의미를 읽어내는 영역이다. 전열은 양쪽 모두에서 함께 행진하는 중이다. 당신이 논의에 동참하려 한다면 맥락을 경유 해야 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다. 그래도 여전히 ‘진짜’ 문제 운운한다면, 발딛은 곳의 이해가 귀찮음을 자랑말라. 당신의 자랑으로부터 오는 ‘꿈’, ‘진리’, ‘진짜’가 때론 게으름으로 읽힐 뿐이다. 

 

글. 압생트(9fift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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