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내 주변에선 찾을 수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치는 일상이며, 일상 역시 정치입니다. 우리는 몇 번을 열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러시아의 민속 인형 마트료시카가, 일상을 파고들 때마다 마주치는 정치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단상들을 정치와 연결짓는 [마트료시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교생 실습을 다녀왔다. 모교로 갔다. 웃기는 일이었다. 졸업한 후로 단 한 번도 모교에 간 적이 없는데, 실습을 하느라 한 달을 꼬박 학교로 출근하게 됐다. 이번 해에 우리 학교로 실습을 나온 교생들은 모두 본교 출신이었다. 실습실에서는 자주 추억이 팔렸다. 자연스레 동창생들의 새로운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 애의 이야기였다. 대학생이 된 후에 그 애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다고 한다. 그 애가 쓴 글을 봤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밝힌 글. 거기엔 그간의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자신을 OO(그 애는 개명했다)라고 불러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간의 이야기’에는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도 담겨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애가 겪었던 그 시절과 그 애가 기억하는 학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동안 내 기억 속에서, 학교에 성소수자는 없었다. 학교는 그들이 원래 없는 것처럼 존재를 지웠다. 나의 모교는 ‘다원화 시대에 맞춰 다양성을 지향하는 교육’을 목표로 내걸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인정한 적이 없다. 아니, 이성애와 이분법적 성을 제외하고 다른 성적 지향이 있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학교에는 그 애 말고도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을 테고, 있을 것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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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

 

교생실습 첫 주에는 학교의 운영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양성평등 교육’ 시간도 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양성평등 교육이 이뤄지는지, 굳이 배울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와 똑같았다. 피임과 낙태에 관한 이야기나 성폭력 예방 교육 정도다. ‘양성’평등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양성 외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까지의 정규교육과정을 마치고도 성소수자의 LGBTAIQ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수업시간은 또 어떤가. 교과서야말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총집합되는 장이다. 내가 가르친 국어 교과서는 온통 이분법적 성이성애 중심의 서사로 채워져 있다. 학생들은 그 교과서를 보며 “백석 시인은 참 잘생겼죠? 우리 여학생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네.”, “이 시에는 남성적인 어조가 드러나죠.” 따위의 이야기를 듣는다. 꽤 많은 10대에게 연애는 핫이슈다. 교사는 그걸 이용해서 ‘이성애 연애’ 썰을 풀거나, ‘이성애 연애’ 소재의 수업자료를 보여주며 학생들의 흥미를 유도한다. 학교는 그렇게 이성애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

 

무지와 배제는 차별과 편견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성소수자가 주변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면, 그 존재가 부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미디어나 온라인으로 접한 성소수자의 이미지만이 남게 될 수도 있다. ‘항문 섹스’라거나, ‘문란’하다거나, ‘남자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 혹은 ‘외모 치장에 관심이 많은 남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빈곤한 상상력만이 실체 없는 성소수자의 자리를 채울 때,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에서 설 곳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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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학교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TV조선

 

실제로 대다수의 청소년 성소수자가 학교에서 교사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성소수자 혐오표현을 들은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성적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동성애는 치료될 수 있다(치료되어야 할 질병이다)”, “동성애는 도덕적이지 않다”, “더럽고 역겹다.” 이런 말을 성소수자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선후배에게, 심지어는 교사에게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열 명 중 아홉 명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침묵한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다른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혐오 표현을 들어도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가 그들의 존재를 지웠기에,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 안을 버티고, 학교 밖의 커뮤니티나 단체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들에게 학교는 ‘도움’과는 거리가 멀다.

 

“넌 왜 맨날 치마 안 입고 바지만 입어?” 그 애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편해서였나, 대충 얼버무린 말도 생각이 난다. 그 시절 우리는 교실에서 얼마나 많은 무지와 차별을 내뱉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의 무게는 이렇게 다르다. 실습을 하는 내내 많은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오만하게도, 나도 학교가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도움을 반쪽짜리로 만든 것 역시 학교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글. 달래.(sunmin53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