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페미니즘 렌즈를 장착하고 봤을 때 불편하냐, 불편하지 않느냐

 

영화를 보고 난 후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안다. 내가 내린 결론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 영화는 100% 불편하거나 혹은 100% 편하기만 한 느낌은 아니다. 어떤 영화를 한 단어로 일축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아가씨’에 대해선 ‘조각’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좀 더 위험하게 말하자면 페티시즘은 어떨까? 본래 성도착증의 일종을 나타내는 페티시즘을 여기서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부분에 현혹되어 버리는 모든 것 말이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으로 호평을 받는 부분과 비판을 받는 부분은 모두 이 조각이라는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총 3부로 조각난 서사

 

영화는 총 1~3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관객은 특정 인물의 시점에서 누가 누구를 배신할지, 어떤 끔찍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상상한다. 처음부터 숙희는 히데코를 속이는데 일조할 생각으로 하녀가 됐고 히데코는 본인 대신 숙희를 정신병원에 넣으려는 무시무시한 속내를 1부 마지막에 내비친다. 여타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약은 여성”이 그렇듯, ‘여자의 적은 여자’ 구조에 따라 그들은 체스말처럼 서로를 공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는 중심엔 백작이라는 남성인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착각을 던져준다.

 

그러나 그 착각은 곧 두 여성인물이 연대하는 순간 산산이 깨져버린다. 전지적이지 않은 서사를 하나둘 맞춰가며 결국 두 주인공이 남성권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쾌감을 느끼는 건, ‘아가씨’라는 영화가 사용한 조각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인물의 성격에 대한 페티시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히데코와 숙희에게 특정 이미지를 부여하도록 공을 들인다. 숙희를 ‘불쌍한 조선인 하녀’로, 히데코를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란 이미지는 극 중 숙희의 입을 통해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한 이미지들은 곧 반전된다.

 

여성 역시 남성처럼 다양한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 영화에서 여성은 엄마, 순진한 소녀, 창녀 정도의 모습으로 파편화됐다. 올 상반기 비슷한 시대 배경의 ‘해어화’만 봐도 그렇다. 여성인물의 성격이 변하는 모습이 지조를 지키는 여성에서 일본군에게 몸을 파는 여성 정도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괴상한 페티시즘과 다름없었다. 그런 방식을 비웃듯, 극이 진행될수록 히데코와 숙희의 캐릭터는 입체적이 되고 생기가 넘친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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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어화’

 

포르노는 나쁘기만 할까?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건 베드신의 연출방식이었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두 여배우의 나체를 감상하듯 움직이고 두 여성의 주체성을 포르노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체성을 섹스에서 찾는 것이 나쁘기만 한 건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마지막 베드신은 ‘은구슬’에 대한 히데코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듯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속 섹스토이인 은구슬과 어린 히데코를 체벌하던 문진의 생김새가 같은 것이 그런 의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남자들의 관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낭독했던 묘사를 두 여자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실천”하는 것으로 의미가 전도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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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를 훔쳐보는 히데코 ⓒ 영화 ‘아가씨’

 

여성의 신체만을 소비하는 것 또한 여성인물을 파편화하는 모습으로 보일 염려도 있지만 이미 이 영화는 작고 큰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히데코의 방을 훔쳐보다 곧 후다닥 달아나는 숙희와 방문 구멍으로 숙희를 훔쳐보는 히데코. 주인공들이 서로를 관찰하는 방식마저 관음증적이다. 베드신은 그러한 분위기를 따라간 것처럼 보였다.

  

박찬욱의 인장을 남기려다 버리지 못한 남성인물

 

이 영화가 가진 조각이라는 속성이 불편했던 순간도 있었다. 코우즈키가 백작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이 그렇다. 신체훼손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들이 공유하는 조각이다. ‘올드보이’에선 오대수의 혀를, ‘복수는 나의 것’에선 류의 아킬레스건을, ‘친절한 금자씨’에선 백 선생의 엄지발가락을 훼손한다. 그런 장면들은 대부분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고 ‘심판을 받는 자’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 장면에서 생기는 긴장감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성 인물들이다.

 

그 장면에서 코우즈키와 백작이 얼마나 초췌하고 멍청해 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타 게이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이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전형적인 구석이 많았다. 아가씨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을 형편없이 소비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여성이 주인공인 퀴어영화라면 남성에 대해 좀 더 과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박찬욱 감독 스타일의 신체훼손 장면을, 그렇게까지 길게 넣으면서 별로 중요치도 않은 인물들의 푸념을 듣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이미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1부에서 간접적으로, 2부 서재에서의 대화에서 직접 드러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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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신체훼손 장면

 

물론 히데코가 왜 그토록 지하실을 무서워했는지, 찌질한 남성 인물을 응징하면서 보여주려는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런 응징의 장면이, 사랑 이야기가 주인 영화의 여타 명장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아가씨’는 여러 조각이 정교하게 합쳐져 멋진 그림을 만든 영화였지만, 그리고 그 조각을 찾아내는 재미야말로 거장의 영화가 가진 특징이겠지만, 지하실 장면은 이 영화의 정체성이기도 한 여성주의적인 시선이 흐려지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100%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없는 것도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아직 한국 영화는 갈 길이 멀다. 올 상반기 영화를 통틀어, 아니 최근 몇 년간의 한국영화를 봐도 여성인물을 이토록 생동감 있게 그려낸 사례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저 페미니즘 이슈가 달아오르는 올해에, 박찬욱 감독이 여성인물을 이 정도로 활용하는 영화를 내놓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표이미지. ⓒ 영화 ‘아가씨’

글. 샤미즈(ndhhdm90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