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이렇게 말했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사방에서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에게 이 말은 큰 위로가 되었고, 이 대사는 <미생> 속 많은 명대사의 하나로 손꼽힌다. 내가 다만 여기저기서 치일 뿐인 못난 사회 초년생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부심’이라는 자각은, 분명 힘든 이들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하는 어떤 원동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자각은, 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일 때에 조금 더 강력한 것이 된다. 딸이 자신이 ‘어머니의 자부심’이 될 수 있음을 말할 때, 거기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모녀관계에서 발생 가능한 감정적 의미가 덧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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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미생>

 

김윤희의 논문 <20~30대 중산층 비혼 여성의 생애 기획>(2012)은 어머니에 의해 ‘어머니의 자부심’으로써의 자신을 내면화한 어떤 여성 청년들을 다룬다. 1980년대 후반을 전후해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이 여성들은 어머니에게 경제적, 정서적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 독립할 시기를 맞이한 이들에게 ‘어머니의 자부심’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논문은 인터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남녀평등’이라는 환상 속 성장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딸만 낳아도 크게 압박을 받은 시기를 벗어 난 거야. (중략) ‘아들이 아니어도 된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던 그런 시점이었어.” (지원 어머니, 59세, 직장인)

 

이 세대의 여성들은 ‘남녀평등’의 분위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성장기를 감쌌던 ‘남녀평등’엔 실체가 없었다. 어머니 세대의 인터뷰이의 말처럼 ‘아들이 아니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이 태어나던 때의 출생성비는 자연 성비를 훌쩍 뛰어넘는다. 2012년에 23살이었던 1990년생의 출생성비는 116.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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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청

 

실체 없는 ‘남녀평등’의 환상 속에서 여성들은 ‘아들 같은 딸’이 될 것을 요구받았다. 아들과 딸의 경계가 뚜렷하고 여전히 딸보다는 아들이 ‘더 나은’ 자식으로 평가받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훌륭해지기 위해서 아들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남자들과 경쟁 심리도 많아. 보통 아들 우대하고 아들이 어쩌고 이런 소리 듣기 싫어가지고. 내가 걔들보다 훨씬 잘나야지, 그런 거. 그래서 책임감 이런 게 컸던 거 같아.” (지원, 31세, 직장인)

 

어머니가 이루지 못했던 것

 

표면적으로 이 여성들은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부모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는 딸들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라”(연수, 27세, 대학원생)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는 인터뷰이의 경험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때 어머니의 지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같은 여성인 딸을 통해 이루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준영 어머니는 장녀로서 동생을 책임지느라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자신을 딸을 낳아 그 딸을 통해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여성들은 어머니의 지지와 지원 속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동시에 어머니에 의해 전통적 의미의 여성성에도 충실할 것을 주문받았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있어 대외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구였다.

 

“성장한 딸은 학교 공부도 잘하면서 취직도 좋은 곳에 하고 이후에 결혼도 ‘괜찮게’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외모도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중략) (외모로 인한) 공적인 활동에서의 불이익을 암시하며 딸은 어머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다.”

 

“엄마한테 실망을 주는 게 제일 무서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여성들은 높은 확률로 ‘어머니의 자부심’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부심’ 안에는 수많은 모순이 있으며, 모순은 여성들이 어머니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하며 최고조에 달한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만 잘 교육받았던 딸들은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이 경우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그 일을 하며 ‘성공’할 것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다.

 

“엄마한테 실망을 주는 게 제일 무서워. (중략) 나는 남보다 뒤처졌잖아. 엄마가 나에 대해 남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지원, 31세, 직장인)

 

‘진로’라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독립해서 나가야 하는 사회가 보수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들의 역할을 다할 것’, ‘예뻐야 할 것’ 등 이들이 이미 겪어 온 다양한 굴레들이 극대화된 한국 사회는, 이들이 성장하며 일시적으로 경험했던 해외의 모습과도 극명히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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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관계는 흔히 ‘애틋한 어떤 관계’로 설명되곤 한다 ⓒ ‘애자’

 

누군가의 자부심 이전의 ‘나’

 

논문은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자부심’으로 자라온 딸들이 모순적인 굴레 앞에서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자부심’으로 사는 것은 비록 모순적이지만, 그 모순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더 거대한 모순과 마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스무 해가 넘도록 지속되어온 어머니와의 유대관계를 바꾸는 일은 잔인한 작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모순적인 사회에서 더 잘 독립하기 위해 이는 불가피하다. 현상을 유지하며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것은 여성을 모순 안에 머무르게 한다. 어쨌거나 어머니의 지원 아래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한 이들에겐 오히려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게 열려있을 수도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어머니의 자부심’보다 그 이전의 ‘나’를 찾으려는 과정이, 어떤 여성들에게는 더 절실하다.

 

글. 아레오(areoj@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