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패배자, LOSER. 이 시대 청년들의 이름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가라”, “대기업에 취직해라”, “정치에 관심을 가져라”, “돌멩이를 던져라”, “어른에게 개념 있게 행동해라” … 사회는 청년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어쩌면 공존할 수 없는 것들도. 청년들은 내내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는 법’을 배우고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버려진다. 청년연구소는 대학을 기준으로 청년을 나누어 그들이 어떻게 패배자가 되는지 2편에 걸쳐 알아본다.

 

“요새 서울대생들은 과잠에 출신 고등학교를 붙인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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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EBS ‘공부의 배신’을 본 사람들은 서울대생을, 명문대생을 탓했다. 서울대생들은 과잠에 출신 고교를 붙이고, 술게임에서 출신 고교를 나누고, 출신 고교별로 따로 모임을 갖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학생으로 비춰졌다. “공부는 잘해도 지성은 갖추지 못한 것들”이라는 훈계가 따라붙었다.
 
‘명문’을 따지는 학생은 누가 만들었나
 
정말로 그들에게 ‘어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냐’라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그 학생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건 사실 사회다. ‘00고교 총동문회’, ‘00중학교 총동문회’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주요한 인맥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고-서울대’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출신’과 성공 코스로 꼽혔다. 우리 사회는 출신 고교가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다. 대학생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것 역시 학벌의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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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따지던 건 당신네 어른들이 아닌가? ⓒ조선일보
 
게다가 모든 서울대생, 혹은 모든 명문대생들이 그럴 거라는 추측은 지나친 일반화다. 2014년에는 ‘연세대 카스트 제도’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연세대생들이 ‘현역 정시 입학’을 성골로 놓고 재수나 수시 입학 등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고함20에서도 반박된 바 있다). 허나 그렇게 ‘차별’하는 학생들이 명문대에서는 일반적인가? 그만큼 대학생들의 ‘지성 수준’은 우려스러운가?
 
답은 당연히 NO다. 흔히들 ‘훌리’(자신 대학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깔아뭉개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라고 부르는 사람들 역시 갓 대학을 입학한 1학년들 중 일부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학생들은 학벌을 대놓고 자랑하거나 대학들을 순위로 나누려고 하는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대학의 이름이나 출신 고교를 두고 차별을 하는 건 ‘어른’들의 사회에서 드러난다. 내가 ‘명문고’라고 불리는 고교에 입학하고 3년 내내 들었던 이야기는 ‘우리 00 명문 고등학교에서는’을 강조하는 어른들이었다. 학생들은 ‘명문고’ 운운을 오히려 우습게 여겼다. “이게 무슨 명문이냐”고 불평할 정도였다. 20대가 되어 나는 다양한 대학의 학생들을 만났지만 먼저 ‘대학’을 묻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 질문 자체가 상대방에게 실례가 될 수 있거나 암묵적으로 계급을 나누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묻고, 알게 되더라도 상대의 대학을 ‘평가’하는 일은 ‘개념 없는’ 행동으로 치환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20대들 사이에선 그렇다. 20대들 사이에선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 학교를 비하하거나 상대 학교를 치켜세우는 일은 있어도, 상대의 출신 고교를 평가하거나 그 수준을 놓고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그건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내 또래 사이에서, 대학을 두고 농담을 하는 일은 있어도 그것이 ‘차별’ 혹은 ‘비하’로 느껴지는 일은 겪지 못했다. 그들이 뒤에서는 뭐라고 할지 몰라도, 최소한 앞에서 상대방을 학교로 평가하는 ‘무례’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학교 이름으로 평가한 건 어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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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무한도전’
  
그동안 만나자마자 대학과 출신고교를 묻고 그것으로 내 인생을 평가하고 차별하고 비하한 건 사회의 어른들이었다. 대학생 최우리(가명, 23) 씨는 지방대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업무를 한 명문대생보다 낮은 월급을 받았다. 그것을 따지자 그는 ‘명문대생과 지방대학에게 급여를 다르게 지급하는 게 규정’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아르바이트도 대학을 봐야 한다’는 말이나 명문대 출신과 지방대 출신을 차별하는 군대의 간부들은 일상이다. 대학을 밝히면 “아이고, 학생 때 공부 더럽게 안했나 보네”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20대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논란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얼마나 ‘출신’에 찌든 사회인가이다. 대부분의 대학생은 출신으로 차별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소수가 그런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고작 그 정도 사회라는 뜻이다. 즉, 학생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그러한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우월감을 심어주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학생들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보통 버릇없는 아이를 보면 ‘부모가 대체 어떻게 키워서’라고 하는 것처럼, 몇몇 학생들이 수준 이하라면 ‘우리 교육이 고작 이 정도구나’라고 할 일이지 학생들을 몰아세울 일이 아니다.
 
허나, 사회는 몇몇 대학생을 ‘몰상식한 청년’으로 몰아세우기 바쁘다. 그 안에서 그런 사회를 만든 데에 대한 책임의식은 부재하다. ‘무개념 대학생’만 남을 뿐이다. 그렇게 명문대 학생들도 패배자가 된다. 명문대에 입학할 때까지 아무도 가르쳐 준 적도, 알려고 하면 혼이 나야 했던 ‘지성’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성인을 기르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 취업을 강조하는 대학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10대를 살아왔지만, 청년들은 패배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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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만 잘 치라고, 대학만 잘 가라고, 그러면 무얼 하든 상관 않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만화 ‘히스토리’ 
 
“수능만 잘 본다면 네가 무얼 하든 간섭 않겠다”는 어른들의 다짐은 온데간데없다. 수능 이후에는 새로운 기준이 들어설 뿐이다.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청년은 다시 ‘노력한다.’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청년은 자신의 뒤가 자꾸만 잘려나가는 레이스를 뛰고 있다. 거기에서 살아남는 청년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명문대생들도 가차없이 잘려나가는 이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비극은, 대학에 가지 못한 이들은 ‘패배자’도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미 한국에서 사라지고 없다.
 
 
글. 감언이설(gchhg2005@naver.com)
대표이미지.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