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아래 글은 영화 ‘우리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가 다 커서 말하는데”.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나에게 말할 때, 언제고 저 말을 붙이셨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우리네 부모님들, 그리고 법이 내게 ‘성인’이라는 호칭을 허락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내게 경제적인 상황에 대해 언급할 때면 언제고 주저했다. 너는 몰라도 돼. 그걸 왜 네가 걱정해. 너는 너 할 것을 해. 나는 뭐든 지원해줄 수 있어.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의 경제 상황’은 언제나 내 주변에 있었다. 친구네 집에서 수북한 장난감들을 보았을 때도. 우리 집 ‘현대 586’, 그 윈도우 95 컴퓨터에서는 디아블로2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이모네와 친구네를 다녀와선 그제야 우리 집만 화장실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도. 밝은 잠귀로 늦은 밤 엄마·아빠의 말다툼을 들었을 때도.

 

세계는 어린이에게 끊임없이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한 현실을 지워낸다. ‘순수’하게 남아있으라. 아니 너희는 이 지저분한 세계를 마주하지 마라. 맑고, 웃고, 즐겁게 뛰어놀고, 천진한 미소를 보여줘. 행복해줘. 그리고 나와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자라줘. 이 독실한 ‘믿음’들은 새로운 어린이를 구성해내고, 어린이는 옷을 입는다. 꿈, 믿음, 순수.

 

어린이와 ‘우리들’의 아이들

 

영화 ‘우리들’은 그 믿음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어린이의 세계란 그러니까, 우리네가 모두 공유하는 어린 시절이란 그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면서, 순수하지 않다. 되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처세, 경제, 갈등, 고민과 아픔이다. 물론 언제고 그들을 다시 밝은 세계로 이끌어줄 ‘놀이’에 대한 기억을 어린이는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과는 다르다.

 

한 아이에게는 현명한 엄마가 있다. 매일 친구에게 얻어터지지만 사랑스러운 동생도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집은 가난하다. 나머지 한 아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두둑한 용돈을 받고, 큰 티브이가 있고, 스마트폰까지 가졌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줄 엄마도, 동생도 없다. 물론, 두 아이 모두에게 아빠는 멀고도 먼 인물이다. 바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시는 사람. 엄마의 세계를 채우는 말이 “아니야, 요즘 애들이 얼마나”라면, 아빠의 세계는 “애들은 원래”로 시작한다.

 

“아니야, 요즘 애들”이건 “애들은 원래”이건 영화 속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 단절된다. 아니, 한 방향의 단절. 아이는 세계를 학습한다. 영화 ‘우리들’ 속의 가난한 아이는 가난이 부끄러움이란 것을 안다. ‘방방’을 타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돈이 없어서”라는 한 마디가 새어 나온다. 엄마와 같이 살지 않는 다른 한 아이 역시 마찬가지. 아이를 둘러싼 세계는 바뀌지 않았고, 그럼에도 아이는 순수해야 하고. 이 때문에 아이의 ‘비밀’이란 이 세계에서 ‘한부모가정’이나 ‘가난’이 어떤 단어인지 알려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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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들’

 

아이는 처세를 배운다

 

아이는 모방한다. 감추고 감추어도 세계 바깥의 폭력은 기어코 아이를 찾아내어 이름을 새긴다. 그 경험이라는 이름은 아프다. 아이들의 세계는 복잡하다. 얽히고설킨다. 내 ‘가난’이라는 낙인이 드러나, 혼자되고 외로울까 무서워서 아이는 ‘화제’를 누군가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다른 아이에게 상처인 비밀일지라도. 다시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아이의 비밀이란 그래서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실이라는 학습의 공간 속에서는 교과서와 함께 아이는 처세를 배운다. 그 처세의 수업 시간을 주도하는 것은 교사가 아니다. 가장 강한 아이, 인기가 있는 아이는 말하고, 다른 아이들은 그 말을 다시 외치고, 교실 내에는 어떤 ‘말’이 가득 차고, 통치하는 세계가 열린다. 외톨이 아이는 그 통치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제를 돌리는 ‘처세’를 배우고, 그것이 허물임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때 그 어린이 곁에 있나

 

씁쓸하고, 헛헛할 일인데 어째 마음이 시큰하면서 따듯하다. 그러니까, 아니 그래도 아이들은 다시 피구를 한다. 말을 걸고, 놀이를 찾는다. 왕따 아이는 매번 ‘금 밟았다’고 몰려서 ‘아웃’될 위기에 처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인기 있는 ‘말’이 지배하는 세계에 그 아이를 감싸는 다른 마디가 얹힌다. 그게 아니야. 그 아이는 그렇지 않아. 아니, 그 아이는 금을 넘지 않았어. 누군가를 배제하던 ‘말’의 통치체제에 금이 간다. 작은 균열하나가 발생했지만, 그 한마디에 다른 아이들이 동조하기 시작한다.

 

피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다. 운동장에 네모를 그리고서도 반을 갈라야 한다. 내 편에서 네 편으로 있는 힘껏 공을 던지다가도,  내 편이 억울할 때는 있는 힘껏 따질 수 있는 운동. 아닌데 금 안 밟았는데, 네가 잘못 본 거야. 그 순간 왕따 아이는 같이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가 된다. 아, 그래. 이것은 놀이였다.

 

작은 공놀이를 위해서는 편을 갈라야 하고, 아이들은 같은 편 하고 싶은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인기투표와 같은 이 편 가르기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름 불린 두 아이 중 한 아이가 나머지 한 아이를 위해 목소리 낸다. 그 아이 금 밟지 않았다고. 배제와 편으로 가득 찬 공간, 경제적이면서 문화적인 것들로 소외, 폭력으로 누군가 외로워하고 있을 때, 그때 내 편된 아이의 한마디는 다른 울림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 목소리는 바깥의 세상이 가장 낮은 곳으로 이끌던 다른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와 우리는 함께 놀이를 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나를 위해 한마디 거들던 아이가 있었다. 그 한마디, 나를 행복한 놀이로 돌아가게 했다. 지금은 어떤가. 곁에 그런 아이 있나. 

 

글. 압생트(9fifty@naver.com)

메인이미지. ⓒ 영화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