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부터 육식 거부를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다.

 

채식을 왜 하느냐고요? 아니, 고기를 왜 안 먹느냐고요?

 

내 대답은 심드렁 반복됐다. “그냥 동물이 불쌍해서요. 아토피가 있어서 고기 안 먹으면 피부에도 좋을 것 같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 뒤 약 2주가량. 식사때마다 나는 “왜 해?”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보통, 예의 ‘심드렁’한 답변으로 무마되어 넘어가곤 했다.

 

한번은 “동물들이 불쌍“하다는 내 대답에 첨언을 들었다. 내가 채식을, 정확하게는 ‘육식 거부’를 진중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물이 ‘불쌍해서’란 표현은 조금 그래요. 동물을 어떤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아닐까요?”

 

첨언을 덧붙여준 그는 10개월 정도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채식하는 이유는 ‘동물도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싶어서’ 라고. 투박하게 줄여 보자면, “동물권을 위해” 내게 그 말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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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물들이 ‘불쌍’했다  ⓒPETA

 

질문을 던지는 삶은 피곤합니다

 

그 이후,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바뀌었다.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진다. “왜 해?” 채식(비 육식)의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불쌍하다는 표현을 어떤 표현으로 바꿔야 할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불쌍해서’라는 표현이 조금은 달라졌다. 이제 대답은 ‘피와 고통에 예민해서, 나 때문에 동물이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

 

육식 문화의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건 ‘소수’가 되는 거였다. 쉽사리 살지 못하는 피곤한 순간들이 늘어났다. 김밥 한 줄을 먹어도 햄이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화장품을 바를 때도 동물실험을 하는 기업의 제품인지를 알아야 했고, 신발과 가방과 팔찌 따위가 동물 가죽인지도 의심했다.

 

사실, 원래는 남들만큼(혹은 남들보다도) 고기를 즐겨먹었다. 나의 식성은 부위별 육감의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급을 매기며 탐했다. 술자리 최고 안주는 고기였고 외식을 하며 기분 낼 때도 고기가 좋았다. 필수 3대 영양소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중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고기라고 믿었다. 편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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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것과 피와 고통스러운 표정 ⓒJo-Anne McArthur / We Animals

 

다만, 가끔 날카로운 것이 살아있는 생명의 두툼한 살집을 관통해 피가 쏟아지는 장면을 상상하거나, 그런 장면이 연상될 때 비린내를 느끼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정도의 예민함을 지녔을 뿐이었다. 육식 거부를 시작한 즈음은 날카로운 것과 피와 고통스러운 표정에 대한 그 예민함이 정점을 찍었을 때다.

 

의심하고, 확인하고, 질문하고, 질문받고… 그 ‘예민한’ 순간들 속에서 육식 거부의 이유는 ‘불쌍하다’에서 ‘동물의 고통받지 않을 권리’로 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아직 내 답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  더 명확한 형태의 답을, 그리고 다른 많은 답을 찾고 싶다. 그래서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다시 의심과 확인과 질문. 신념을 갖춰가는 과정은 피곤하다.

 

그래도 계속해보겠습니다.

 

하지만 피곤하다는 것이 곧 염증이 난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대답을 못 한다는 것이 포기로 이어질 건 아니니까. 육식 불매의 선택 후, ‘공부’라는 좀 더 적극적인 선택을 이어가고 있다. 채식을 하거나 “동물권”을 외치는 다른 사람들의 글과 책을 읽는다. ‘불쌍하다’는 표현의 적절치 못함을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했고, 나만의 언어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덤으로 얻어진 분명한 것 하나. 개인인 ‘나’의 선택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하나의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육식 거부

 

계속해보겠습니다.

 

특성이미지. ⓒ PETA

글. 김연희(injournalyh@naver.com)

기획. 김연희, 엑스, 이설, 콘파냐, 호빵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