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서울의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 살아가는 청년인 내가 이 거대한 도시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피시방, 찜질방, 음식점 등 24시 사회가 된 세상은 밤낮없이 굴러가지만, 창문을 열어도 하늘을 볼 수 없고 빽빽하고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나 자신만을 발견하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해 돌아가는 삭막한 세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순간마저 괴롭다.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지금도 열심히 취업 준비(혹은 공부)를 할 텐데’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거대화된 도시를 뜻하는 메트로폴리스. 이 세계에서는 자본의 논리가 도시의 삶의 방식을 장악했고, 거대한 건물들 사이에서 사람들 간의 유대감 또한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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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Unsplash

 

이양숙의 <메트로폴리스의 시공간과 청년의 감정 : 21세기 초 도시 청년의 감성 구조>(2016) 은 김애란 소설에 나오는 청년들을 통해 청년들이 메트로폴리스적 시공간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감정의 변환’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 청년들은 더 이상 즐겁고 진취적인 청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보통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욕심인가요?

 

김애란의 소설 「사랑의 인사」 속 청년은 아무것도 될 수 없음에 절망하며 ‘보통사람’이라도 되고 싶어 한다. 대학을 진학했지만, 집안이 망하면서 거대한 서울에 상경해 반지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도도한 생활」의 청년 역시 큰 꿈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회적인 관계를 맺길 원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도도한 생활」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모욕이나 동정을 받지 않는 ‘보통사람’이 되기조차 너무나 어렵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사회 전반의 불평등은 계속 심화되는 중이고, 개인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청년도 예외는 아니다. 직업전선에선 정규직이 되기가 힘들고, 대학생은 아르바이트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다. 동시에 청년들은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괴로움에서 허우적거린다. 메트로폴리스의 세계는 잔인하다.

 

3포세대, 5포세대에 이어 7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포기)라는 말까지 나왔다. 살아남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점점 늘고 있다.  기성세대는 단지 ‘요즘 청년들은 우리 때와 다르게 나약하다’며 혀를 찰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청년들이 나약하기 때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자, 때로는 혀를 끌끌 차기만 하는 앞선 세대의 방관이나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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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년의 도전의식이 결여된 게 문제인가? ⓒ KBS1

 

잔혹한 낙관주의

 

도시의 경쟁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실패를 경험한 청년들은 타인에 대한 시선을 의식하며 ‘수치심’에 빠진다.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기계발을 하며 희망을 품지만, 희망에 다가가는 것마저 실패하고 만다. 미래를 그리며 노력하면 할수록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를 흡수하고 경쟁을 내면화함으로써 고도 경쟁 체제를 재생산한다.”

 

철학자 로렌 벌랜트는 이와 같은 가혹한 현상을 청년세대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잔혹한 낙관주의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실제로는 자신의 현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남들에게 부끄럽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삭막한 도시에서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미래를 위한 삶만 존재할 뿐 남은 현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수치심은 청년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기반”에 불과하다고 저자인 이양숙은 말한다.

 

김애란의 소설 「침이 고인다」의 청년은 이런 괴로움에서 안도감을 느끼고자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용품으로 샤워하며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잠시라도 정해져 있는 경쟁의 길을 넘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선택은 환상이다.

 

그래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런데도 김애란 소설 속 청년들은 무기력함에 발버둥 칠지 몰라도 이에 잠식당하진 않는다. 「종이 물고기」에서 주인공은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고통을 이해하고 연민하며 자신의 관심사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은 타자를 유의미한 존재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때때로 수치심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도 한다. 이는 삭막한 메트로폴리스의 시공간에서 ‘마주침’의 거름이 된다.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도 김애란 소설 속 청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메트로폴리스의 시공간 속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지만, 현실은 사회관계 혹은 인간관계 안에 ‘잘’ 편입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청년들은 이러한 소통의 부재 속, 소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면대 면으로 만나는 날보다 SNS나 휴대폰 메시지로 의사소통하는 날이 늘고 있을지 몰라도, 삶이 변화했을 뿐 이들의 삶 속에도 공감을 기초로 한 연민이 존재한다. 또한, 타자를 의식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적인 감정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전환하는 수치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이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 해주는 마주침이 존재한다. 이는 삭막한 메트로폴리스의 시공간에서 볼 수 있는 변화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주침으로 가기까지 머뭇거림이 존재할 수 있다. 실패할지도 모르며, 소통의 욕망이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들을 함부로 나약한 존재라 규정할 수 없듯이, 무기력함에 빠진 존재라고만 얘기할 수 없다. 누구도 청년들의 ‘마주침에 대한’ 실패에 대해 안타깝게만 볼 수 없으며 “마주침에 대한 욕망 그 자체로도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글. 엑스 (kkingkkang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