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양영순/네이버)의 ‘8우주’는 말할 것 없이 마초적이고, 어떤 의미론 폭력적인 세계관이었다. 그 안에서 태모신교의 무녀들은 성상납을 통해 거대한 ‘패트론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고, SF 액션의 뼈대인 ‘전투 퀑’의 영역은 99%의 확률로 남성캐릭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역기를 등에 메고 터질듯한 근육을 뽐내며 “(여자는) 50kg 이상은 몬스터!”라 외치던 발락의 대사는 에피소드 ‘식스틴’을 이끌어가는 이야기적 동력원으로 작동하며 8우주의 마초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 ‘50kg’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남자의 이야기가 바로 ‘식스틴’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이 8우주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두 여성 퀑 ‘공자’와 ‘가우스’가 8우주 최강의 자리를 두고 사투를 벌이고, 그들을 포획하기 위한 평의회 추격대 대장 ‘샵’마저 여성 퀑이다. 지금껏 등장했던 전투 퀑 중 작품에서 뚜렷한 활약을 편 여성이 ‘가야’ 한 명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이 성비는 거의 비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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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캐릭터 공자 / 가우스 / 샵 ⓒ 양영순

 

그뿐이 아니다. 아름다운 외모로 그려진 공자는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칭찬(?)에 “매력? 그건 외모 평가질할 때나 쓰는 말 아닌가?”라 쏘아붙이고, 근육질의 “언니” 가우스는 능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맨손으로 적들을 때려눕히며 “난 피지컬 자체가 무기라고!” 자신만만 대사까지 날려주신다. 한술 더 떠 두 여성의 걸크러쉬 와중에 끼어든 새로운 능력자 샵은 공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레즈비언 캐릭터다.

 

외향으로나 내향으로나 단순 ‘쎈캐’에 머물지 않고 입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들 캐릭터는 작가 양영순의 세계관에 찾아온 거대한 전환이라 할 만하다. 노골적인 상남자식 섹드립으로 인기를 끌었던 전작 [누들누드]나 [아색기가]를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작가 양영순은 최근 스스로 공자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인물이라 밝혔다.

 

그 영향은 단순히 캐릭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경제, 계급, 범죄적 혹은 성적인 측면에서 다소 폭압적인 구조를 지닌 ‘8우주의 질서’가 무대라는 점에서 이 작은 변화는 서사 전체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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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한 마디 ⓒ 양영순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감동적인 에피소드들로 꾸며졌지만 8우주의 이면은 본래 추악하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겐 특히 그렇다. 우주적 거대 종파인 태모신교는 무녀들의 성상납이라는 사실상의 합법적 여성 착취 시스템에 의존해 있다. 봉건적 귀족 계급 사회에서 귀족에게 고용된 퀑들은 탈주민을 처리하는 임무 와중에 “제법 귀엽게 생”긴 여성을 골라 아무렇지 않게 강간하려 한다. 심지어 엘가의 매니저 마빈이 “축제를 불태우러” 달려간 행성 네카르는 그 자체로 거대한 공창이다. 자급자족이 원칙인 이 행성에선, 열다섯 소녀 시타마저도 “주로 남자를 상대하는 젊거나 어린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덴마]의 우주는 이미 그 자체로 지옥 같지만, 그 지옥 속에서 다수 여성의 삶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비참해진다는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네카르의 한 여성이 말했듯, 그 비참함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까. 공창 구역의 소녀부터 근육 마초들의 시시한 농담까지, [덴마] 내의 서사적 마초성은 이러한 (작품 안팎의) 수요에 기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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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론과 무녀 사이 성상납은 수요 대 공급의 권력적 구조를 보여준다 ⓒ 양영순

 

그러나 공자가 외모품평에 짜증을 낼 때, 가우스가 근력으로 남자들을 두드려 팰 때, 여성인 샵이 여성에게 얼굴을 붉힐 때, 8우주의 ‘여성상’은 그 잔혹한 수요 밖으로 벗어난다. 그것은 곧 견고한 시스템의 전복이고, 그 전복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태모신교의 성상납 시스템이나 마초 캐릭터들의 저질 농담까지, 서사 내 우주의 면면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수정해나갈 수 있다. 양영순이 관록의 경지에서야 비로소 만난 페미니즘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건 성찰이다. 영화감독 박찬욱이 [아가씨]를 통해 자신이 답습해온 남성중심 서사에 대한 반성문을 기록했듯, [덴마]의 길고 긴 세계관은 새롭게 튀어나오는 ‘전혀 다른 매력’의 인물들과 그들을 통한 구도의 전복을 통해 세계관 자체의 지형을 뒤바꾸고 있다. 그리고 현실 사회를 지극히 반영하는 마초적 세계관에 스스로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다분히 성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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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만으로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는 가우스는 존재 자체로 혁명적이다 ⓒ 양영순

 

양영순 작가는 지난달 자신의 SNS 계정에 김자연 지지 선언에 참여한 채색 담당 홍승희씨를 응원한다고 글을 올렸다.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우호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에 걸친 비난 뒤 “독자들의 귀한 신뢰”를 위해 입장을 철회한다는 사과문을 작성했다.

 

그 “귀한 신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를 위해 철회한 입장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의 8우주가 어떤 모습일 지도 또한 미지수다. 그러나 그의 긴 우주를 함께 걸어갈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것이 이제야 싹튼 성찰을 부정하지 않는 방향이길 빈다.

 

글. 인디피그(ghin28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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