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요? 동물혐오와 육식이 당연시되는 세상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아쉬움을 남겨두고 고함20의 기획 [동물혐오]를 마무리합니다.

 

‘육식중심주의’ 사회

 

초등학생 때 우유급식을 받았다. 학생들은 매일 다 먹은 우유갑에 이름을 적어 제출했다. 우유를 먹어야 ‘참 잘했어요’나 ‘착한 어린이’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우유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우유 급식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린내를 참고 먹는 수밖에. 우유뿐 아니라 일반 급식도 그랬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든, 아니든 모든 음식을 골고루 남김없이 먹어야 했다. 그런 급식에는 영양균형을 위해고기반찬이 올라왔다.

 

일방향의 식습관. 예컨대 유년의 ‘우유’와 ‘고기반찬’은 내게 그런 단어를 상기시킨다. 우유와 고기가 ‘맛있고 건강한’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음식으로 어린 나를 찾아온 데서 알 수 있듯, 취향(맛있는 것)과 영양(몸에 좋은 것)에 대한 우리 사회 선호의 기본값은 단연 고기다. 육식을 전제로 한 일방향의 식습관이 당연시돼 있다는 말이다.

 

52201-1우유를 먹는 아이는 ‘착한 어린이’ 였다. ⓒ PETA

 

당연한 것은 사회화된다

 

반대로 ‘육식을 전제하지 않는’ 식습관에 대해선,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을 토양이다. 우유부터 고기반찬까지, 취향이나 선호에 상관없이 육식을 해야 ‘참 잘한 어린이’가 되는 경험들이 그것을 조성한다. 청소년기 우리는 스스로 ‘정말 육식을 좋아하는지’ ‘육식이 아닌 다른 식습관이 있는지’ ‘왜 육식이 주 식습관인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이 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이들의 가정과 학교 등을 통해 ‘육식중심주의’가 다시 대물림된다.

 

채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시각도 여기서 비롯한다. 육식중심이 견고해질수록, 육식 외의 식습관에 대한 사고는 생략되니까. 채식에 대한 정보와 식단은 부족하고 채식주의자에 대한 배려 또한 부족해진다. 이미 육식으로 사회화가 진행 되는 사회에서 채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지속할 수 있다. 육식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는 채식 신념을 ‘살려내기’ 위해 매 순간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채식이라는 것을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육식이라는 선택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인지하게 해주는 과정 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유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데 있다. 가정, 학교, 병원 등에서 ‘육식을 하고 싶지 않은 것(비육식)’이 하나의 선택이자 자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교육과 배려가 필요한 때다.

 

‘육식자본주의’의 질주

 

육식중심이 견고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기는 상품이 되고, 다시 상품으로서 끝없이 소비(육식)를 권한다. 고기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 전략은 좋은 예시다. 판매자는 삼복, 삼겹살 데이, 짜장면 데이 등 ‘데이 마케팅’을 통해 특수를 누린다. 얼핏 당연한 상품 전략이지만 이미 언급한 ‘육식 사회화’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대안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52201-2

ⓒ 아주경제

 

고기를 먹으면 행복하고 좋다는 이미지도 적극 활용되는데, 그 과정에서 웃지 못 할 폭력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삼겹살 가게의 상호가 ‘착한 돼지’가 되고, 고기 굽는 자세를 취한 채 웃고 있는 동물 캐릭터가 가게 모델이 된다. 이때 접시 위에 올라온 동물에게 드는 죄책감이나 불편한 감정은 생략된다.

 

자본주의식 상품 전략이 끼어든 육식 사회에서 식습관의 선택은 고기를 먹냐 아니냐가 아니다. 끊임없이 육식을 소비시켜야 하는 자본 사회는 많은 고기 중 ‘어떤 고기’ 혹은 ‘어떤 고기 음식’을 먹는지를 선택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A고기, B고기, C고기 중 하나’라는 선택지 아래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던 고기를 소비하게 된다.

 

기업부터 소상공인까지,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잘못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육식중심 사상이 만연하고 동물권에 대한 고민도 아직은 부족한 사회에 자본주의가 결합할 때, ‘동물을 죽이고 소비하는 폭력’은 성찰 없이 질주하게 된다.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한 비윤리적 도축, 공장식 축사 같은 것들이 그 질주의 결과물이다.

 

52201-3

공장식 축사의 모습 ⓒ 생명체학대방지포럼

 

최근 논란이 된 강아지 공장, 고양이 공장 등 반려동물 ‘생산’을 위한 동물학대의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동물권에 대한 사회의 총체적 인식 부족과 그에 결합한 자본의 이윤추구 행위가 만든 비극이고, 하여 결국은 사회 전체가 동참한 동물혐오의 표본인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 혐오 없는 사회를 위하여

 

‘당연한 것’에 대한 성찰 없이 다수와 관습을 기준으로 정해진 사회규율은 정상(육식)과 비정상(비육식)의 구분을 만들고, 강자의 편의를 위해 짜인 권력관계를, 그로 인한 혐오를, 가해와 피해를 동반한다. 왜 고기 안 먹어요? 예컨대 비육식을 밝힐 때마다 듣기 마련인 질문은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 상기시킨다.

 

육식을 거부하거나 채식을 하는 건 사실 단순히 식습관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 반영된 결과다. 본인으로 인한 타 생명에 대한 폭력을 그만둔다는 선언이자 생명을 존중하겠다는 (최소한 그러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는) 표현이다. 즉, 이 사회의 동물혐오에 대해 조금씩 반격해 나가겠다는 나름의 발버둥이다.

 

‘왜 고기를 안 먹어요?’가 아닌 ‘왜 고기를 먹어야 해요?’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넘어서 오래된 ‘당연함’ 때문에 우리의 인지 밖에 있던 동물혐오를 깨닫고 수정해 나가야 한다. ‘비육식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는 바로 그를 위한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기획팀 [동물혐오]가 바란 것도 미숙하지만 그것이었다.

 

대표이미지. ⓒ dosomething.org

글. 김연희(injournalyh@naver.com)

기획. 김연희, 엑스, 이설, 콘파냐, 호빵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