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 개강을 맞은 게 벌써 2주가 넘어가고 있다. 개강하면 늘 보이는 대학가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동아리, 대외활동 홍보 포스터가 대학 게시판을 가득 메웠고, 캠퍼스 이곳저곳은 동아리 홍보 부스로 가득 찼다.

 

학교를 가득 채운 수많은 동아리와 대외활동들은 그들의 집단에 속하면 좋은 경험을 만들 수 있다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열변한다. 홍보 포스터의 모집 대상 안내에는 ‘열정 있는’ 분들이면 되니 부담 없이 지원하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난 잘 모르겠다. 동아리와 대외활동의 모집 대상이 정말 열정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건지 말이다.

 

장애라는 프레임

 

지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시각장애인인 그는 최근 동아리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지인이 지원했던 동아리는 러닝크루를 구하고 있었다. 매주 7km 이상의 마라톤을 하고, 평소에도 여러 운동을 즐기는 그를 동아리가 밀어낸 이유는 ‘장애’ 때문이었다.

 

그는 면접 때 자신의 수많은 (그리고 좋기도 한) 마라톤 기록을 보여줬고, 자신이 어떻게 뛰는지를 설명했으며 -코스를 따라 보조 끈을 잡고, 동반주자가 함께한다- 안전상의 안정성도 충분히 강조했다. 그리고 그가 그날 저녁에 받은 불합격 통지 문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 때문에 함께하기 힘들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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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고 넌 불합격이야 

 

장애인 지원자에게 ‘불가능’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건 순식간이다. 장애를 가진 그가 면접장에 서는 그 순간이면 충분하다. 많은 경우 ‘가능’을 이야기하는 장애 당사자의 설명은 (비장애인들에게) 단순한 자기변호로 그치고 만다. 러닝 동아리에게 시각장애인 지원자는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비장애의 권력이 쌓아놓은 ‘불가능’의 프레임이 해당 동아리에 시각장애인 지원자를 뽑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제공해준 셈이다. 프레임은 그들에게 편견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면 ‘이런 일’은 할 수 없다는 사실 아닌 사실로.

 

하지만 진짜 사실은, 장애인과 함께여서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에 대한 필요가 장애인과 어떤 일을 함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아리, 더 나아가 사회는 이 사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불합리한 프레임을 장애인에게 멋대로 씌워버렸다. 그리고는 불가능이라는 프레임이 진짜 사실인 양 굴고 있다. 프레임은 편견의 고착이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혹은 그런데도) ‘나도 뛸 수 있다’는 누군가의 설명이 프레임을 깨뜨리기에 그것은 너무 단단하고, 높고, 뿌리가 깊다. ‘가능’에 대한 수많은 증명에도 불구하고 ‘불가능’ 판정을 받은 지인의 일화처럼.

 

에이, 착한 척하지 마세요

 
불합격 이후, 지인을 러닝 동아리에 추천했던 마라톤 주최 측 관계자에게 동아리 회장이 건넨 말은, “그분도 한 번쯤 같이 하면 좋겠네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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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할지 말지는 내 마음이다! ⓒ무한도전

 

‘한 번쯤 같이 하는 존재’는 곧 ‘내가 베푸는 존재’로까지 이어진다. 그것은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라는 말 뒤에서 비장애 권력을 성찰치 못한 동아리의 모습과 겹쳐졌다. 이중적이며, 위선적이다. 누군가를 배제한 “누구나”라는 문구가 그렇고, 기본적 존중을 갖추지 못한 시혜적 멘트가 그렇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장애인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런 자격을 줄 자격은 없다. 비장애인들이 동아리를 선택하듯, 장애인들도 동아리를 선택할 뿐이다.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너 얘랑 걸어서 몇 시간 받냐?”

 

장애인은 대한민국의 동아리와 대외활동에서 주체이기보다는 객체, 대상이다. 학창시절,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가입한 봉사동아리의 봉사 대상, 내가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는 대상. 이 사회의 프레임 속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동아리에 ‘대상’으로 남는다.

 

지인은 학창시절에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자신과 걷는 누군가는 봉사시간을 얻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 지인의 면전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너 얘랑 걸어서 몇 시간 받냐?”는 대화를 비장애인 친구와 나눴다. 장애인을 순식간에 자신의 봉사시간 취득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우리 사회 속 장애인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다.

 

사회는 장애인을 어떤 동아리의 회원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동아리 목적에 맞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왔다. 마치 ‘함께 뛰는’ 걸 강조한 러닝 동아리가 충분히 같이 뛸 수 있는 시각장애인을 거부해놓고, 한 번쯤 같이하면 좋겠다는 말로 ‘함께 뛰는’이라는 수식어를 정당화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 “한 번쯤”의 이벤트를 다시 홍보에 사용하겠지. 한껏 미화해서, ‘열정만 있으면 모두 함께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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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귀

장애인들이 대상으로 남아있길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가 그들의 역할을 멋대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객체적 위치는 피상적으로만 평등을 외치는 이 사회에서 모순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장애인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척하지만, 여전히 한 쪽에서는 장애인이 수단화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학의 꽃’이라 불리는 동아리마저 장애인에게 수단의 역할만을 제시하고, 주체로서의 장애인은 보지 않는다.

 

학기마다 동아리 모집 풍경은 또 펼쳐질 테고, 이 프레임 투성이 풍경도 또 펼쳐질 것이다. 지인은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시선을 가지는 날이, 그래서 그들이 이벤트의 객체가 아닌 활동의 주체로서 평가받는 날이 곧 도래하긴 할까? 슬프지만, 난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날이 오길 원하고 있을 뿐이다.

 

글. 모킹버드(sinjenny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