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구합니다

 

중간고사다. 대한민국의 흔한 대학생들이 그렇듯, 나도 몇 학기째 똑같은 패턴의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몇 년째 똑같은 강의내용을 외우고, 몇 년째 똑같은 – 심지어 오타마저 똑같은 시험 족보를 구한다. 어떻게 써야 점수를 잘 받는지 팁을 구하는 것까지 지난 학기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의 주장과 성향에 어긋나지 않는 답안을 제출해야 좋은 학점이 보장된다.

 

하지만 내가 대놓고 ‘족보 구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생이 결과 중심적으로 공부한다’며 약아빠졌다고 욕먹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대학족보공유 사이트들의 여는 글은 족보공유에 대한 비난을 예상한 관리자의 변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로, 대학의 족보공유는 이 사회에서 ‘요즘 대학생들 쯧쯧’ 정도의 비난으로 귀결된다. 허나 ‘결과’ 중심적 공부를 비판하는 사회가 대학생들을 ‘결과’로만 평가하는 모습은 아이러니다. 족보 본다고 욕먹는 대학생 1인인 나는, 그래서 억울하다.

 

왜 족보에 매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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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시험 4부 – 서울대 A+의 조건’(EBS 다큐프라임)에 쏟아진 비판들이 불편했던 것도 그 억울함 때문이리라. 그저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필기하고 교수님의 세세한 개인적 주장까지 그대로 암기하는 서울대 엘리트를 보고 대중은 경악했다. “어떻게 서울대 학생이 저래?” 시험장에서 교수의 의견에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순 암기만으로 시험을 치르는 대학생들이 약아빠졌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학생들을 비난할 수 없다. 사실 진짜 약아빠진 건 바로 대학이다.

 

몇 년 동안이나 시험문제를 바꾸지 않는 교수의 태만(혹은 자신이 낸 문제에 대한 자부심인가?),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좋은 학점은 주지 않는 편협한 사고방식, 대놓고 ‘족보 찾아보시면 쉬울 거에요~’라고 말하는 몇몇 교수들의 태도까지. 학생들이 족보를 찾아보게 만든 건, 시험지에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게 만든 건 교수와 대학, 그리고 이 사회다.

 

대한민국 교육은 12년 이상의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그게 왜 궁금해? 시험에 안 나와!’라고 말해놓고, 갑자기 대학생들에게 비판적이고 창의적일 것을 요구한다. 게다가 기출문제가, 아니 (그대로 나올) 출제문제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욕구를 참아가면서 공부하고 시험 치길 바란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학점을 잘 받는 것(결과)까지 요구한다.

 

그렇게 얻은 학점은 너희의 능력이 아니다…?

 

족보 공부법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얻은 학점은 너희의 능력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우리의 능력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온전한 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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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뭔데? ⓒ대학일기

 

대한민국에서 능력은 능력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에 이르렀다. 능력은 본질에서 벗어나 인맥, 지연, 그리고 태어난 환경에 의해 만들어져왔다. 대한민국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는 이미 의미가 퇴색되었다. 심지어는 지연과 학연, 부모에 의한 계급의 재생산이라는 이중적인 악영향만 남겼다. 나는 이런 대한민국에서 “너희는 온전한 능력으로 평가받아야지!”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방대한 시험 범위 중 시험에 나올 부분만 암기하고 예상답안을 만들면 시험을 잘 칠 수 있다. 그것이 내 (취업에도 도움 되고 부모님께도 부끄럽지 않으며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는) 학점을 만든다. 그리고 교수는 늘 그랬듯 이번 시험에서도 문제를 똑같이 낼 것이다. 그런데 그 시험방식에 맞춰서 공부하지 말라니. ‘교수가 문제를 그렇게 내도 청년은 점수에 연연하지 말아야지’라니? 학점에 적힌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의 숫자 세 개로 날 평가할 이 사회가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며 학생들에게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로 가라고 강요하는 것 모순이다.

 

족보식 시험은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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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끼(웹툰 치즈인더트랩)

 

물론 족보식 시험 자체는 없어져야 한다. 족보식 시험의 근본은 ‘인맥’이다. 족보식 시험의 결과는 ‘누가 열심히 공부했나’보다는 ‘누가 정보력 있게 문제를 수집했나’에 달려있다. 웹툰 ‘치즈인더트랩’ 속 대학생들의 족보를 얻기 위한 사투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은 이유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던 대학에 왔더니 인맥에 의해서 내 학점이 달라진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역대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문제를 열람할 권리가 대한민국의 학생들 모두에게 있었다. 어떤 선배한테, 어떻게 잘 보여야 하는 인맥 싸움으로 내 노력의 인풋, 아웃풋의 정도가 정해지지는 않았다. 대학에 왔더니 판이 달라졌다. 인맥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을 대학이 그대로 보여준다. 

 

대학생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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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대학일기

 

다만 족보식 시험을 없애는 주체로 학생을 내세우는 것, 그리고 ‘학생이 먼저 족보 안 보면 족보식 시험도 없어지는 거야~’식의 논리가 역겹다. 대학을 인맥 중심적으로 만든 것도, 능력을 능력이 아니게 만든 것도 학생이 아니다. 더욱이 시험을 족보식으로 출제한 사람은 학생이 아니다. 잘못된 문화에 대한 비난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글. 모킹버드 (sinjenny97@naver.com)

특성이미지. ⓒ대학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