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 이 씨발년아. 빨리 안 내려올래?”

 

한 작가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긴 글이다. ‘좋아요’가 수백 개를 넘어섰고 ‘사이다’라는 찬사의 댓글도 이어진다. 자주, 원색적인 비난은 인기가 좋다. 비난의 대상이 공공의 적일 경우 더욱 그렇다. 확실히 박 대통령은 시국의 공적이고, 필자는 심지어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기도 한 일명 ‘진보 지식인’이다. 바로 여기서 정치적 선악 구도가 뚜렷해지고  “씨발년”은 속 시원한 정의의 철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정의로운가?

 

최근 시국에서 비난을 넘은 원색적 혐오 표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제각기 분노의 말을 뱉어내는 사이, 그 분노와 온도를 같이 하는 혐오도 끊임없이 생산된다. 최순실이 ‘저잣거리 강남 아줌마’로, 박근혜는 ‘닭년’으로 불린다. 트위터에선 최순실과 박근혜가 실은 연인 사이 아니냐며 ‘박근혜는 최초의 LGBT 대통령이다.’라는 비아냥도 등장했다. 한 대학의 사학과는 ‘병신년의 국가 수치’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올렸다가 비난을 받고 제목을 수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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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캡처

 

해당 발화들은 소위 말하는 ‘진보적 분노’의 맥락 위에 등장했지만, 그를 빌미로 모종의 혐오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저잣거리 여인네’나 ‘강남 아줌마’가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탄식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수준의 시대착오적 전제와 더불어 ‘돈 많고 개념 없는’ 이미지의 ‘강남 (중년) 여자’를 다시금 호명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적이다. ‘LGBT 대통령’은 성 소수자의 약자성이 비난의 기제로 작동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위험을 담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빈도 높게 사용되는 “~년”이란 표현은, 외려 그 당연함 때문에 특히나 문제적이다. 

 

2.

‘년’과 ‘놈’은 단순히 성별을 낮잡아 지칭하는 대칭적 단어가 아니다. ‘사내, 남편’과 같이 단순히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로 쓰였던 ‘계집, 녀편’은 한국 사회의 여성 지위 하락과 맞물려 비하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언어 어떻게 다른가>, 전혜영, 2004) ‘놈’과 ‘년’도 마찬가지다. 형태상 여성과 남성을 지시하는 대칭어로 보일지라도 ‘년’이 ‘놈’보다 강한 비하와 모욕을 담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가 실재하는 사회에서, 언어 속 은밀한 차별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건 결국 차별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과 같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젠더 권력의 비대칭성에 대한 인식의 폭 자체가 부실한 것이고, 알고도 그 욕설을 사용하겠다는 건 아집이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혐오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둘의 결과는 같다.

 

욕설을 통한 분노의 표출, 그 잠깐의 카타르시스는 종종 성 소수자, 장애인, 여성, 무속인, 중년 여성의 인권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단언컨대 이것은 인권의 소비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하고 시위에 나가는, 일명 ‘진보’를 지향하는 이들이 약자와 연대하기는커녕 다른 약자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정치적 부조리에 피가 끓는 이들이 다른 약자의 당면한 불평등을 도외시하는 건 얼마나 모순적인가.

 

3.

언론에서도 혐오를 적극 권장한다. 미르재단에 관여했던 고영태는 호스트바 출신이라더라, 최순실이 무당이라더라, 정유라가 임신을 했다더라 하는 자극적인 보도가 이어진다. 언론사는 사람들의 분노를 통해 클릭을 유발하고 트래픽을 통해 돈을 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호스트바에서 알게 된 고영태를 재단에 기용한 것, 정유라가 임신한 기간에 대회 출전을 핑계로 학교에 출석하지 않은 것, 정부 정책을 논리적 판단이 아닌 샤머니즘에 의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분명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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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바’가 고영태 논란의 핵심이 됐다 ⓒTV조선

 

그러나 고영태 문제의 본질은 그가 호스트 주제에 나랏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사적인 친분으로 재단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정유라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어린 여성이 임신하고 아이 아버지가 삐끼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학교에서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순실이 무당인지, 프라다 신발을 신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기업에서 불법적으로 돈을 받아 챙기고 그 대가로 어떤 특혜를 제공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언론은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보는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이는 윤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신학생 연석회의의 시국선언문에는 ‘체제 자체에 귀신이 들려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최순실이라는 악마 같은 개인이 사라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백억을 챙기고 대기업에 특혜를 제공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과정을 아무도 고발하지 않고 굴러가게 하는 사회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를 비롯한 개인들에 대한 분노에만 집중하는 사이 우리가 정말로 봐야 하는 체제적 문제는 뒤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은 위에 언급한 분노를 가장한 혐오 표현의 문제점과도 맞닿는다. 예의 진보적 분노가 강대한 권력이 아닌 약자 층위를 향할 때, 그 분노의 동력이 사안의 본질이 아닌 대상의 특성에 의존할 때, 그 형태가 풍자가 아닌 혐오를 뒤집어쓸 때 진보는 자신의 이름을 잃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아닌 “씨발년”으로 존재할 때, 진보는 말의 가장 비겁한 어느 언저리를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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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혐오는 함께할 수 없다 ⓒ녹색당

 

4.

누군가는 정치란 원래 논리적이거나 원론적이지 못하다고, 이런 ‘사소한’ 지적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일 뿐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강박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극적인 소문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고, 정치는 원래 흙탕물인 게 현실이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광장에 몰려가 퇴진을 외치는 것은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고 운동을 하고 페미니즘을 하고 인권을 말하는 것은 결국 모두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같은 논리의 결과물이다. 그 논리 위에서 올바름에 대한 요구, 언어에 대한 강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글. 유디트(ekitale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