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때문에 이 일이 있다”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문장입니다.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제시해 주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남’이라는 시작이 명확해도, 그 결과의 모양새는 복잡하지요. 하나하나의 ‘끝’에 대해 설명할 길도 넘쳐납니다. 우리는 여러 갈래의 결과에 대하여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의 길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계속 꺼내보고 싶은 것부터, 덮어두고 싶은 것까지. 그것은 우리 [人과관계]의 성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새내기 시절 3월은 선배들과의 식사 약속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배들이 사주는 점심 덕분에 점심값을 굳히던 즐거움도 잠시, 3월의 ‘밥약’은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밥을 사는 ‘보은’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밥을 사준 선배들 모두에게 보은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선배한테 보은으로 밥을 사겠다고 할지는 후배인 새내기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어딘가 묘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면, 정답이다.

 

1.

“야, 너는 왜 A 선배한테 보은해? 그 선배 인싸 아니잖아. 돈 아까워~”

 

4월 어느 날, A 선배와의 보은 약속으로 과방을 나서는 나에게 동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인싸도 아닌 선배에게 (돈 아깝게) 왜 보은을 ‘해주냐’는 식이었다. 예의 ‘묘한’ 지점이 여기에 있었다. 밥을 같이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에서 새내기의 선택을 좌우하는 게 인싸와 아싸라는 정체성의 차이라는 것. 과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인싸’와 그렇지 않은 ‘아싸’ 사이에 어떤 관계적 계급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선배 인싸 아니잖아.” 과방에서, 그 말에 동조하던 많은 얼굴들을 기억한다. 딱히 이렇다 할 반박 없이 쿨하게 넘기던 나의 모습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을까.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혹은 ‘인싸 집단’에서 이상한 애로 튀어 보이지 않고 싶어서였을까. 찌질한 두 가지 보기 중 뭐가 더 찌질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자가 진짜 원인이었음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사실은 그 당시의 나도 알고 있었다. ‘쿨’한(척하는) 자신이 찌질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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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인싸인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귀귀

 

2.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말로만 듣던 인싸와 아싸의 구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내 동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인싸가 되고자 노력했다. 인싸집단이 ‘쿨’해 보였다. 3월의 밥 약속을 수십 개 잡았던 것도, 별 관심 없던 과 소속 학회에 가입했던 것도, 가고 싶지 않았던 술자리에 꾸역꾸역 나가던 것도 다 인싸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인싸라는 타이틀에 매달렸던 걸까. 하기 싫은 것들까지 하면서 내가 인싸로 남으려 했던 건 ‘인싸는 좋은 것, 아싸는 나쁜 것’이라는 보편적 인식의 역할이 컸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 직전까지 “대학 가서 아싸는 되지 말자”며 친구들과 낄낄거렸던 나를 기억한다. 아싸는 사회성이 부족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나와 친구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싸가 되기 위한 노력들은 사실 아싸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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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리, 우리, 그리고 집단

 

사실 그건 아주 오랜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우리’ 학교, ‘우리’ 동아리, ‘우리’ 가족을 강요받아왔다.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하면, 어른들은 “네가 우리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너희 가족에게 부끄럽지도 않니” 등의 말로 개인이 속한 ‘우리’ 집단이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기 일쑤였다. 그와 동시에 반대로 누군가가 집단을 비판할 때는, 그 속에 속한 개인까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그러면서 집단과 내가 하나가 되어갔다. 집단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될 것 같았다. 내가 곧 집단이며, 집단이 곧 나였다.

 

개인(나)이 집단(우리)으로 치환되는 경험. 그 경험을 훌륭하게 자기화했는지 아닌지가 개인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싸와 아싸 사이 관계적 계급의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집단에서 열심히 활동하지 않는 개인은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 된다. 반대로 집단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주류’는 정상적인 사람, 혹은 착한 사람이 된다. 물론 비정상과 정상, 나쁨과 착함은 ‘무능력’과 ‘능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나쁘고 무능력한 사람’과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줄 세우는 건 어렵지 않다. 결국 인싸가 되려던 내 노력은, 집단 속 나쁜 (혹은 무능한) 주변인이 되기 싫었던 어린이의 발악이었다.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나도 줄의 앞쪽에 서고 싶었다.

 

3.

“B 걔 요즘 나한테 인사 안 하더라. C랑은 인사하던데.”

“뭐 대학에 우리 같은 애들만 있겠냐. 그런 애들도 있는 거지. 이해해주자”

 

이 대화가 나의 인싸 생활 종지부가 될 거라고 그 자리의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고맙게도) 이 순간은 나를 인싸가 되기 위한 발악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나는 저 이해심 많은 인싸 친구들이 B나 C에게 먼저 인사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인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인싸들의 모습에선 그들 집단의 ‘뭐라도 되는 듯한 자신감’이 보였고, 그게 새삼 웃겼다. ‘아싸들보다는 내가 낫다’는 식으로 종종 말했던 그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말을 ‘아싸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혹은 ‘인사 못 받아도 이해해주는’ 저 자아도취적 자신감과 연결하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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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들이 뭐길래 ⓒ무한도전

 

우리 인싸 집단의 찌질함을 항상 모른 척하던 나였지만, 뭔가 잘못됐단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던 ‘우리 같은 애들’은 무엇이며, 또 ‘이해’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 같은 애들’은 쿨한 시혜자고, 아싸는 그런 자신들의 이해와 존중이 필요한 (열등) 집단일 뿐이었다. 이 묘한 계급의식이 그 외의 영역에도 정확하게 반영됐다. 인싸들은 과 행사, 학교행사에 대한 아싸들의 의견을 쉽게 배제하고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지들이 뭐길래.

 

정작 B와 C는 인싸들의 관용적 ‘이해’따위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인싸와 아싸의 구분이, 그리고 인싸가 되고자 노력했던 나의 노력이 쓸데없었음을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쿨해 보였던 인싸집단이 그제야 찌질하게 느껴졌다.

 

4.

그 후 인싸 집단에서 벗어나 자발적 아싸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 말하면 억지로 붙잡고 있던 인싸의 끈을 놓자, 자연스레 아싸가 되었다. 단언컨대 아싸라는 정체성은 ‘편했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학회를 억지로 나가지 않아도 됐고, 의미 없는 술 게임만 하는 술자리에 가지 않아도 됐다. 선배들에게 아부를 떨지 않아도 됐고, 과 행사에 당당히 불참하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혼밥의 좋은 점들을 알게 됐다. 의미 없는 술모임이 줄어들자 자기계발 시간이 늘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집단 속의 관계에 매달리지 않게 되자, 개인과의 관계를 더 자유롭고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아싸는 부적응자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 같은 아싸들은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점들이 공동체로서 좋은 점들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우리’ 과, ‘우리’ 집단이 다인 줄 알았던 내가 어느 순간 개인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싸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내가 깨달은 것은, 누구도 아싸의 개인주의적 삶에 ‘좋다, 나쁘다’의 가치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응 이해해~ 근데~’식의 지적질도 마찬가지로 금지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자발적 아싸들은 자신의 개인주의적 삶에 행복해하고, 친구가 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것을 거북하다고 느꼈다.

 

5.

‘핵인싸’였던 내가 자발적 아싸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아싸가 되고 나서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대학 입학 후 첫 한 학기 동안 나는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증 치료를 고민했다. 몇 달 동안 나는 오후 3시의 신촌 한복판, 축구 경기가 한창인 학교 대운동장 등 장소 불문, 시간 불문 갑자기 울곤 했다. 아무리 술 마시자는 친구들이 많아도, 애인이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가족을 볼 수 있어도 외로움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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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사람은 많았지만, 외로웠다

 

당시의 외로움은, 북적대는 인싸들간의 관계 속에서 나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관계를 많이 만들면 그 속에 ‘나’라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찾지도, 완전한 관계를 만들지도 못했다. 거기에서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이 만들어졌고, 결국 ‘내’가 무너졌다.

 

불완전하고, 기만적이기까지 했던 인싸 집단 관계를 무너뜨렸다. 관계의 틀을 벗은 나를 찾을 수 있었다. 관계 속 나를 억지로 찾기보다는 ‘알고 보니’ 개인주의적인 나를 받아들였다. 막상 나를 찾으니 나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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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이었던 관계는 망했지만, 이 망함이 마음에 든다

 

관계를 선택하는 가장 완벽한 주체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집단은 완전한 관계를 만들어 줄 수 없으며, 집단 속의 내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완벽한 수식어가 될 수도 없다. 관계를 고정관념 속에 가두고 관계 속 정체성을 규정할 때, 관계와 ‘나’는 함께 몰락한다.

 

결국, 대학입학 전 내가 로망으로 꿈꾸곤 했던 ‘핵인싸’ 인간관계는 망했고, 대학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내 발악도 망했다. 하지만 그 ‘망함’에 후회는 없다. 나는 아싸고, 개인주의적이며, 이런 내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

 

글. 익명(editor@goham2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