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JOY.흥을 깨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여성혐오와 반성평등적 컨텐츠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 흥을 깨지 않으면 계속해서 번식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KILLJOY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단 한 번도 성평등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킬-조이] 연재를 통해 마음껏 고함20이 느낀 불편함을 말하고 설치며 흥을 깰 예정이다.

 

힙합 프로그램이 대세다. 그와 함께 힙합은 지극히 한 문화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힙하고 젊고 멋지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뭔가 뒤떨어진 사람이 된다. 그러나 국내 주류 힙합이 진보적이고, ‘젊은’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아니. 그 단어들과 국내 힙합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물과 기름처럼 경계가 뚜렷해 보인다. 국내 힙합을 움직이는 큰 원동력의 하나는 여성혐오 정서다. 여혐을 일삼는 마초성이 과연 힙하고 트렌디한 것일까?

 

힙한 척, 반항적인 척하지만 실상은 고루한 혐오 덩어리. 대중 힙합의 중심에 있는 (몇몇?) 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말은 변명의 좋은 예다. TV에 출연하는 대다수 래퍼가 ‘그런’ 식이라면, 마니아가 아닌 대중의 눈높이에서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 일반 대중의 시선에서 힙합은 자주 약자를 혐오하거나, 때론 ‘노오력’신화를 칭송하는 자기 자랑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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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뉴뮤직

 

‘나쁜 년’은 저항적이지 않다

 

11월 23일. 산이는 박근혜 대통령을 저격한 ‘나쁜 년’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박근혜를 저격했다고는 하나, 가사를 보면 박근혜의 정치적 잘못은 드러나 있지 않다. 몇몇 펀치 라인을 통해 김빠진 사이다를 마시듯 만들다 만 통쾌함을 전달할 뿐이다. 원색적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나쁜 년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산이를 ‘영웅’으로 만드는 방향이었다. ‘국정농단 스웨그’ (일요신문), ‘이렇게 통쾌할 수가’ (한국경제 TV) 등등 수많은 헤드라인이 이를 증명한다.

 

표현이 상스러운 것도, 시기가 늦었다는 것도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너무 가볍게 비판한 게 문제냐고? 아니다. 문제는 어떤 정치적 비판이나 권력적 저항 없이 박근혜의 ‘여성’ 속성만을 물어뜯은 데서 온다. 박근혜로 표상되는 거대 권력을 짓밟아야 했을 노래는, 그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약자를 짓밟는다. 박근혜를 비롯한 부패 인사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충혈된 네 눈 홍등가처럼 빨개”, “병신년이” 등 여성 혐오적 표현을 곳곳에 심어놓고 대중의 칭찬을 바라는 태도는 기만적이다. 그 대중이란, 저급한 유머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는 계층에 한하기 때문이다. 가사 속의 ‘나쁜 년’은 비판과 저항의 내용이 부재한 채 비유의 껍데기만 뒤집어썼고, 결과적으론 박근혜와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못한 채 여성 일반을 향하게 된다.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새누리당 지지자들 역시 72.9%가 박근혜의 탄핵이나 하야를 원한다. 대다수가 등을 돌린 상대를 풍자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 쉬운 일마저 여성혐오를 동반하지 않으면 완성하지 못한다.

 

헤이러들을 욕하기 전에

 

산이는 랩 가사에서 종종 hater들을 저격한다. “네가 날 싫어해도 난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도 잘 나갈 거야” 이게 산이를 비롯한 국내 힙합이 말하는 스웨그다. “네가 뭘 지적했는지 알겠어. 노력해볼게”하는 쿨한 모습이 아니다. 본인의 잘못을 회피하는 유아기적 모습이 성인 남성의 스웨그가 된다. 그런 스웨그는 예지의 ‘미친개’ 피처링에서 잘 드러난다. “암캐 한 마리 미친년”이라는 가사 뒤, “여성부 하지 마 욕 얘 허락 맡았으니까 난 절대 안 여성혐오해”라는 변명을 덧붙인다. 자신의 가사가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것을 알며, 논란이 될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정당화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못 먹는감’, ‘Body language’ 등 그의 다른 랩에도 여성 대상화가 가득하다.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욕하는 것. 고작 이것이 산이라는 래퍼가 구축해온 서사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있다. 펠릭스 발로통은 여자 엉덩이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에드가 드가는 소아성애자처럼 발레를 하는 소녀들만 주야장천 그렸는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그게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21세기에 여성은 더는 뮤즈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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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의 그림

 

산이는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예지를 칭찬하며 여성 래퍼 일반을 깎아내린 적도 있다. “보통 여자 래퍼들 발음이 안 좋은데….”를 시작으로 한 그의 칭찬은, 그가 구축해온 여성혐오의 서사와 함께 맞물려 힙합과 여성에 대한 그의 무의식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여성은 (힙합의) 주체가 되는 게 불가능하며, 랩 가사 속 어떤 대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힙합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미술학자 린다 노클린은, 여성 아티스트는 3% 미만에 불과하지만, 여성 누드화는 83%에 이른다고 말했다. 발가벗겨져야만 미술관에 들어가는 여성. 그리고 암캐가 되거나 나쁜 년으로 대상화되어야만 노래 속에 들어가는 여성. 이게 여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잘 팔리는 여혐, 잘 팔리는 페미니즘

 

어쨌든 본인은 차트 1위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 모든 비판을 열폭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여혐은 잘 팔린다. 메갈리아4와 메르스 갤러리 저장소의 구독자가 만 단위라고 기겁하지만, 김치녀 페이지2는 구독자 20만을 돌파하고 장렬히 사라졌다. 남성들이 떼거리로 등장해 성희롱 수준의 랩을 해도 시청률은 올라가고 음원은 순위권 안에 든다. 개저씨들이 예능 MC 자리를 장악하고 한국 영화는 알탕 카르텔에 갇혀 있다. 그들이 기세등등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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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이 너무 익숙하다 ⓒ라디오스타

 

절망적인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선 페미니즘이 팔리고 있다. 여성 중심의 영화인 ‘아가씨’가 흥행에 성공했고, 씨스타의 뮤직비디오에는 레즈비언의 사랑과 데이트 폭력 문제가 담겨 있다. 페미니즘 도서 판매량이 급증했고, 관련 굿즈가 속속들이 제작되고 있다. 그러한 기류는 필요한 것을 선도하고 보이지 않던 부분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대중과 함께 호흡해낸다는 점에서 ‘힙’과 ‘팝’의 양립을 이뤄내고 있다.

 

진정 트렌디하다는 건 이런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 끝났어야 할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약자, 소수자를 염두에 두는 것. 그것을 문화적 감수성으로 소화하는 것. 최근 몇 년간의 동향을 보면, 트랜디함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PC함에서 나온다. 마초성의 반대편에선 페미니즘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시류다. 이 시류를 따라가지 못할 때 산이는, 아니 대부분의 래퍼는 유물로 도태될 것이다. 언제나 문화란 그런 것이니까.

 

글. 샤미즈(ndhhdm90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