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이슈에 망언은 끝이 없다.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 달라.” 세월호 7시간을 포함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의혹들에 박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씨가 내놓은 지난 15일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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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

 

해당 발언에 대한 비판이 많이도 쏟아졌다. 당연한 현상이다. ‘정치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사생활이니 양해해 달라’고 넘어가려는 태도는 무책임과 무양심을 넘어 무지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 무지의 영역에서 국민은 지난 4년간 몇 번이고 삼켰을 의문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체 말이 통하긴 하는 걸까?”라고.

 

때로 무지는 죄다. 국가 체제의 근간이 걸린 이 이슈에서는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여성의 사생활’을 운운하는 유 변호인의 말에선 공직자의 책임과 윤리에 관한 최소한의 이해와 더불어 매우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젠더의식 부재까지 겹쳐 보였다. 이때 후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지를 넘어선 혐오의 전략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는 호소엔 (1)여성에겐 (남들이 눈감아줘야 할)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있다는 오랜 이미지와 (2)여성은 어떤 사회적 질타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라는 고정관념이 다시 담긴다.

 

둘을 무 자르듯 분리할 순 없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공적 영역과 ‘여성적인 것’을 분리시켜온 오랜 남성중심문화의 산물이고, 후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각인시킴으로써 가능했던 가부장적 시혜다. (‘여성이 여전히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과 ‘가부장 사회가 구성해온 여성의 약자성’은 그 층위가 전혀 다르다) 특히 공적 영역과 분리된 채 사생활화된 여성성은 종종 섹슈얼리티와 연관된다. 대통령 사생활과 관련한 성적인 조롱들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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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혹은 성적 전형성을 이용한 조롱 ⓒ 한겨레

 

발언은 이렇게 ‘가부장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을 답습해 공적 문제를 사유화하려 했다. 그리고 축적된 불평등성을 어떤 문제의식도 없이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여성혐오라고 부른다. 발언 속 ‘젠더의식의 부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게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원래의 의도였던 ‘공적 책임의 회피’를 위해 약자 혐오적 전략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발언은 무지의 지점을 넘어선다. 그 효과를 차치해 두고 그것은 가장 비열한 방식의 혐오 전략이다.

 

무지는 때로 죄지만 혐오는 그냥 죄다. 이 이슈에서 무지와 혐오라는 것도 무 자르듯 분리할 순 없겠지만, 따지자면 무지는 원인의 영역에 가깝고 혐오는 결과의 영역에 가깝다. 이해할 수 없는 정부 태도의 이유를 추리해낸 값이 발언 속의 ‘무지’라면, 자체로 가부장 사회 젠더권력이 현실에 실현된 결과가 바로 ‘혐오’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보여주는 ‘여성’

 

생각해보면 이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가 대권 도전 때부터 이어온 ‘반여성’적 정치, 그 역설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공인 박근혜는 국민 앞에 ‘여성’으로 재현되길 망설인 적이 없다. 그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고 독재자(혹은 영웅)의 ‘딸’이었으며 이른 나이에 부모를 여읜 ‘퍼스트레이디’였고 불리한(혹은 필요한) 때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자’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가 취해온(혹은 취해진) 그 모든 ‘여성’은 결과적으로 반여성적이었다.

 

여성 박근혜가 어떻게 반여성적일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박 대통령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가 ‘여성’인 점이 비난의 이유가 되기도, 추대의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그도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가 내세워서 실패하거나 성공한 모든 ‘여성’성이, 여성의 소수자성을 극복하는 방향이 아닌 답습하는 방향으로 쓰여 왔다는 점이다.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배려해 달라던 변호인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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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통령으로서 대체 무엇을 바꿨나? ⓒ MBN

 

그의 ‘준비’가 유리천장에 도전하는 사회적 여성으로서의 그것이었다면 여성 대통령의 ‘여성’은 숭고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를 졸업하고 정치적 개인으로 자립했다면 독재자의 후광(혹은 망령)을 소화하는 고루한 ‘딸’의 이미지에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약한 여자’라는 낡은 연출을 팔아먹지 않았다면 ‘눈물’은 혐오의 빌미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그 모든 걸 너무나 쉽게 포기했다.

 

예컨대 유 변호인의 말은, 그(대통령)가 할 수 있었을, 그러나 쉽게 포기해온 것들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그가 포기한 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했다. 보건복지부의 ‘아름다운 가슴’, 여성가족부의 장관직 비리, 치솟는 여성혐오 이슈와 낙태죄와 혐오살인과 성폭력과 저출산에 대한 한심해 빠진 해결책 같은 것들 말이다.

 

여성 대통령 집권 4년 동안 대통령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그는 노력을 보인 적이 없다. 그저 대통령의 위치에서 여성을 소비해왔을 뿐이다. 한 공직자의 게으름이 파국에 이른 지금, 우리가 100만의 광장에서 재확인하는 여성의 모습은 어떤가. ‘씨발년’ 혹은 ‘나쁜 년’? 아니면 정치적 죄를 ‘섹스 비디오’로 징벌받아야 하는 대상?

 

박근혜 vs 여성

 

대중 일반의 여성혐오를 부족한 여성 지도자의 탓으로 돌리는 건 안 될 말이다. 애초에 그가 남성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반여성 정치’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 또한 또 다른 여성혐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긴말 돌려 ‘여성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이 시국의 공적 ‘여성 대통령 박근혜’에서 억울한 건 고유명사 ‘박근혜’가 아닌 일반명사 ‘여성’이란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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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 페미당당 

 

박근혜 하야 시위에 등장하는 페미니즘이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근혜 이슈에 페미니즘을 들이대는 건 박근혜가 여성이기 때문에 저항의 흐름을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대권력과 교차하여 이중적으로 약자를 억누르는 박근혜‘만의’ 여성성에 저항하는 것이다. 복잡한 맥락을 파헤쳐 무의식적인 기득권을 배제해 나가는 것이고, 정말로 ‘억울한’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여성혐오를 비롯한 모든 권력에 대한 저항이 바로 거기서 시작해왔다.

 

글. 인디피그(ghin28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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