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표창원 의원실에서 기획전시한 ‘곧, bye! 展’의 <더러운 잠>이 논란을 빚었다. 해당 그림은 마네의 <올랭피아>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를 패러디한 것으로, 전라의 여성은 박근혜의 얼굴을, 흑인 노예는 최순실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박근혜가 들고 있는 부채에 사드와 아버지 박정희를 표현했고, 최순실은 주사 다발을 들었다. 창밖에는 세월호의 침몰이 그려졌다.

 

문제가 된 건 박근혜를 ‘올랭피아(전라의 매춘 여성)’의 자리에 두었다는 점이었다. 풍자화 속 나체는 <잠자는 비너스>의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구도가 마네의 작품을 그대로 따른다는 점에서 박근혜는 올랭피아의 자리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인격 모독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보수 단체에서는 해당 작품을 강제로 철거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빈곤한 생각이 뱉어낸 풍자

 

작가는 ‘창밖의 참사를 외면하고 잠이나 자는’ 대통령을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에 그 잠이 더럽다고 썼다. 올랭피아는 매춘 여성이다. 박근혜를 ‘벗은 창녀’에 은유하면 ‘더럽다’는 이미지를 잘 드러낼 수 있겠구나, 작가의 빈곤한 생각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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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네의 <올랭피아>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린 것은 ‘더러운 창녀’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연한 정면을 응시하는 올랭피아에 의해, 매춘 여성을 향한 멸시가 전복된다. 패러디가 원작자의 의도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단지 ‘여성 누드’로 그것을 소비한 <더러운 잠>의 풍자는 지나치게 일차원적이다. 빈곤한 생각에 기반한 예술은 뻔한 통념을 재생산할 뿐이다.

 

 

왜 박근혜를 ‘누드’로 만들어야 했을까. 남성적 시선은 벗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소비해 왔는가. “하고 싶다”와 “줘도 안 한다”는 모두 여성에 대한 성적 소비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지독한 대상화라는 점에서 같다. <더러운 잠>이 야해서 문제인 게 아니다. 작가는 예술을 외설로 보는 보수적인 인식을 탓하며 자위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자. 문제는 박근혜를 손쉽게 조롱하기 위해 성적 대상화를 택했다는 점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수치를 주기 위한 방식으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더러운 잠>의 풍자 방식, 박사모의 분노 방식

 

 

박근혜는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 반인반신으로 떠받들리는 대통령의 딸로 살다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점은 그가 가진 약자성이다. 박근혜 누드화가 전시되고 소비된 일련의 과정은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또다시 확인시킨다.

 

 

새누리당 전국여성위원들이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박근헤 대통령 누드화’ 전시를 비판하며 표 의원의 부인을 벗기겠다는 식의 같은식의 비하 문구가 담긴 손피켓을 들고 있다.

새누리당 전국여성위원협의회는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주마”란 표현을 사용했다. ⓒ민중의소리

 

 

기계적 중립(“박근혜 누드화가 여혐이면 이명박 누드화는 남혐이냐?”)은 사양한다. 여성의 나체와 남성의 나체가 소비되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만약 그것이 정말 같다면, 분노한 박사모 회원들은 표창원 의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누드화에 합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모는 표창원이 아닌, 그의 아내의 얼굴을 택했다. 여성의 누드가 전시되는 것이 여성에게 큰 수치심을 주고, 그로써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게 타격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나는 그러한 ‘수치 주기’를 끊임없이 경험했다. ‘걸레’라고 비하하거나, ‘보지’로 호명하거나, ‘강간해버린다’고 협박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최근에는 여성 지인들의 얼굴을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과 합성하는 ‘지인 능욕’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남성이 여성을 수치스럽게 만들어 억압하려는 의도임을 알기에 초연하고자 노력하지만, 성적 대상화와 위협에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여성으로서 내가 갖는 약자성이다.

 

 

그네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더러운 잠>의 풍자 방식과 박사모의 분노 방식은 다르지 않다. 가장 민감해하는 약자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건 명백한 혐오다.

 

 

표현의 자유는 혐오의 권리가 아니다

 

 

콘텐츠의 여성혐오 논란에는 늘 ‘표현의 자유’ 논리가 따라온다. 이번 박근혜 누드화 논란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들어 옹호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그러한 옹호는 두 지점에서 타당성을 잃는다. 우선 표현의 자유가 비판받지 않을 자유는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표현은 평가받는다. 그 평가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혐오표현에 대한 비판을 표현의 자유로 무마하는 것은 ‘덮어놓고 계속 혐오하겠다’는 의지다. 혐오표현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비판과 작가의 성찰이 이뤄져야만 건설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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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더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가 혐오할 권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자꾸 이걸 착각하니 이제는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적 규제 논의가 대두한다.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점을 비하한 풍자화가 공공기관에 걸렸다.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 전시가 철회됐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전시 철회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인가?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로 접근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고백과 다름이 없다. 정 혐오를 표현하고 싶으면 방에서 혼자 하자. 타인이 그 혐오와 마주하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비슷한 논란이 반복될 때마다, 같은 말을 되뇐다. 혐오 없이도 표현하고, 풍자하고, 예술 할 수 있다.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수치를 주려고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날카로운 풍자가 가능하다. 어떤 여성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혐오’로 고통 받지 않아야 한다.

 

 

글. 달래 (sunmin53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