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순이는 약자다”. 이것은 한 아이돌의 팬이 된 순간부터 뿌리박힌 명제였다. 얼마 전 래퍼 도넛맨이 남긴 트윗만 봐도 그렇다. 그의 가사에 담긴 여성 혐오적 표현을 지적하니 “가서 아이돌 음악이나 들으세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이돌 팝과 그 팬들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이돌 팬은 여성혐오자들에게 만만한 대상이고 수준 높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얼빠들이 된다. 확실히 그들은 약자의 포지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돌 팬덤이 페미니즘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약자와 가해자의 경계에 있었다. 강자라는 게 아니다. 빠순이라고 혐오당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혐오하는 집단으로 작용하는 게 아이돌 팬덤이라는 이야기다.

 

장면 하나

 

12월 3일. 샤이니의 종현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한 남성 관객을 향해  “존중은 하지만, 전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인도풍 분장을 한 채 코믹한 춤을 연출한 VCR이 상영되기도 했다. 몇몇 팬들은 이를 지적했다. 퀴어포빅하며 타문화를 희화화했다는 것이다. 종현은 피드백을 했으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팬들 개인 계정의 트위터와 팬 커뮤니티를 통해 종현의 언행을 문제를 제기한 L 씨를 비롯한 팬들에 대해 사이버불링(온라인상에서 특정인을 비난하고 신상을 터는 등 괴롭히는 행위)이 시작됐다. 이에 몇몇 트위터리안들과 샤이니 팬덤, 타 아이돌 팬덤이 #팬덤_내_사이버불링_아웃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팬덤 내 자정작용이 일어났느냐고? L 씨는 12월 4일, 종현의 막콘(마지막 콘서트)에서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냐”는 폭언을 듣는다. L 씨에 대한 신상털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 씨는 이 사실을 본인 트위터에 올렸고, 팬덤 내에서는 L 씨가 막콘에 갔다는 증거가 없다며 샤이니 팬덤 내에서 티켓 인증을 해 L씨의 자리를 찾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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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씨에 대한 자리찾기 계정이 있었다.

 

장면 둘

 

젝스키스의 이재진은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강성훈의 옷차림에 대해 “에쿠스에서 내리는 부동산 아줌마 같다”는 말을 했고, “팬들이 오빠가 아닌 아저씨라 부르면 물을 뿌리겠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일부 팬들은 이재진에게 페미니즘 도서를 선물했다. 이재진은 그중 한 권을 팬 공식 홈페이지에 인증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스타-팬과의 훈훈한 일화 하나쯤으로 기억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팬들은 “지니(이재진) 힘들었겠다”, “존나 짜증난다 미친년들” 등의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페미니즘 도서를 선물한 팬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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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방송 ⓒ MBC

 

팬덤은 약자이기만 한가?

 

어느 순간 팬덤의 움직임은 획일화된 길을 가지 않았다. 더는 ‘우리 오빠’를 무조건 감싸줄 수는 없다며 연예인의 혐오 발언을 비판하고 짊어지는 팬들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과거에 머물기를 선택한 팬들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팬이 충돌할 때, 약자는 전자의 경우였다. 그들의 의견은 무시됐으며 “탈덕을 하려거든 조용히 하라”는 팬덤 내 암묵적인 협박이 있었다. 아이돌 팬덤이 ‘맨스플레인을 당하는’, ‘여성 혐오적 폭언을 듣는’ 집단에서 누군가를 가해하는 집단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팬덤 내 사이버불링을 지적하는 글에서 한 팬은 이런 지적을 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팬덤 문제의 특수성에 따라서 볼 필요가 있다”고. 앞서 지적한 대로, 팬덤은 약자이면서 가해자이다. 특수성이 있는 집단이 맞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팬덤 내 문제(사이버불링)를 논의할 때 팬덤 외부와의 갈등(빠순 혐오)을 가져와서 매번 약자 포지셔닝만 한다면, 팬덤 문화는 진보하지 않는다. 사이버불링 피해자 L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윤리나 인권과 연결되기 때문에 팬덤 내부의 룰(그 룰이 윤리나 인권과 반대될 때)보다 먼저 고려될 수 있다고. 아이돌의 혐오 발언이나 팬덤의 사이버불링을 지적하는 행위는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옳은 행동이기 때문이지 팬들을 가르치기 위한 게 아니라고.

 

그들은 남성 연예인을 성희롱했나?

 

팬덤 내 사이버불링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데엔 팬덤이라는 집단의 특수성도 있지만, 일종의 물타기성 이슈가 개입한 까닭도 있었다. 종현의 혐오, 타자화 행동을 공론화하고 팬덤 내 사이버불링 운동을 주도한 팬들이 샤이니 멤버들에 대한 성희롱성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면서 남성을 성희롱하는 건 괜찮냐”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고, 사이버불링의 원인이 성희롱성 발언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가 와전됐다.

 

비판은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여남 모두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여성이 남성을 대상화하는 것 또한 잘못됐다는 공평한 의견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애써 외면하며 기계적 중립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남성이 여성을 욕망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욕망하는 건 ‘음란한’일이 된다. 이 상황에서 여성이 남성을 성희롱했다는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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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아이돌그룹 성희롱 건으로 고소된 이세영씨는 무혐의 통지를 받았다. ⓒnews24

 

“여성연예인을 성희롱했으면 여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라는 말은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를 가린다. 연예계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희롱에 비판이 이어지는 이유는, 특별히 여성들이 극성스럽고 남성이 약자여서가 아니다. 현실의 구조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곳곳에 널린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그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가시화된 지 얼마 안 된 역사까지. 모든 것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백 보 양보해서 남성 연예인에 대한 성희롱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작용해 그 피해가 지금 여성들이 받는 피해만큼 된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사이버불링 논란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팬덤, 팬아트를 비롯한 RPS(Real Person Slash의 준말로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한 BL물-남성 간의 연애물을 말한다)는 이미 팬덤 내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한 사항이다. 팬픽의 존재에 대해 모두가 알지만, 그에 대해 ‘성희롱’이라며 공론화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끼어든 성희롱 논란이 물타기용으로 보이는 이유다.

 

팬덤 내부의 연대가 필요하다

 

2개월째가 됐다. L 씨는 법률 대리인을 통해 몇몇 악플러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L 씨를 향한 일부 비방글은 삭제가 됐다. 비방을 한 이들이 L씨에게 사과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L 씨는 사이버불링 초기에,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이 열세였다고 말한다. 팬덤 내에서 사이버불링에 반대하는 쪽보다 적극적으로 L 씨를 괴롭히는 사람이 다수였다.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팬덤 내 불편한 문화를 깨닫거나 공고한 생각에 균열이 생기는 사람이 존재하는 등 고무적인 일도 있었다고 했다. L 씨는 더는 사이버불링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그런 미래를 위해, 사이버불링 피해자가 발생할 경우 집단을 막론하고 연대하려고 한다고 했다.

 

2016년 여름의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메갈리아4 티셔츠 논란과 관련된 여러 문제. 페미니스트들은 그때 Girls do not need a prince를 외쳤다. 이번 일의 본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이버불링의 가해자였던 팬들은 L 씨를 비롯한 공론화 계정에 대해 ‘짹죄자'(트위터 유저를 가리키는 짹짹이+범죄자의 합성어)라 칭했다. 자신들 역시 페미니스트고 트위터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그들과는 구분되고 싶으므로 트페미(트위터를 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짹죄자’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함께 Girls do not need a prince를 외치던 페미니스트들이 누군가를 배척한 이유는 ‘우리 오빠’, ‘우리 애’에 대한 비틀린 애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나와 친밀한 어떤 남성을 왕자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왕자는 필요 없다고 외치던 때처럼 연대해야 한다. 페미니스트와 아이돌 팬덤은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 샤미즈(ndhhdm9019@naver.com)

대표이미지. ⓒ카툰네트워크 / 스티븐유니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