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설이 싫다.

 

1. 효자 되기 vs 페미니즘

 

작년 추석에는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아빠에겐 소리도 좀 질러봤다. 맛없으면 직접 해 드세요! 뭐 이런 내용으로 말이다. 때마다 반응의 변화가 제법 심상찮았다. 처음에는 ‘기특하다’는 웃음이, 그다음에는 ‘왜 저러니’ 하는 당황이 나오더니, 다시 다음에는 엄마와 숙모의 노골적인 거부감에 마주쳤다. 우습게도 아빠는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시골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먹은 점심, 나는 거의 ‘적당히 좀 하지?’쯤 되는 눈치 속에서 건넛방으로 찌그러졌다.

 

돌아오는 길에 형은 칭찬받으려고 환장한 막내아들의 기행 정도로 내 행동을 평가했다. 자취방 설거지는 쌓아두면서 본가에 오니 성실한 ‘척’한다는 그의 논리가 그럴듯했다. 말하자면 ‘효자 코스프레’라는 거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게 아닌데’하는 반발심과 ‘그럼 그렇지’하는 피로감이 동시에 들었다. 결국은 피로감이 이겼다. 그게 아니라고, 오해를 풀겠다고 내 모든 것을 던져 반발할 힘 따위 내게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던 걸까, 의욕이 없었던 걸까. 답은 묘연하다.

 

언제부턴가 ‘명절노동’이 달갑지 않았다. 전을 부치고 만두를 찌고 상을 차리는 일련의 행위가 최대한 낭만적이고 화목하게 그려지는 TV 속 장면들도 불편해졌다. 비단 미디어 속 ‘낭만적 가족’과 현실의 격차 때문은 아니었다. 외려 그 둘이 동시에 가리고 있는, 그러나 현실에선 조금만 눈을 돌려도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명절 내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흔한 얘기다. 그러니까 일하는 여성들, 그리고 노동의 결과물을 입에 넣으며 ‘주부의 미덕’ 따위나 말로 내뱉는 남자들, 뭐 그런 풍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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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집Ⅱ, 이순자의 집#2-제사 풍경 2004 ⓒ사진작가 이선민

 

예컨대 설거지는 일종의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풍경의 한가운데서 숟가락 들고 음식을 기다리던 내 모습이 역겨워서, 그게 TV 속 근사한 낭만보다도 훨씬 더 불편해서, 혹은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선이라도 그어보겠다는 졸렬한 심리로 선택한 나름의 도전 말이다. 그에 대한 가치평가를 미뤄두고, 우선 이건 효자가 되고 싶은 것과는 아주 다른 얘기다. 효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고, 아니 외려 필사적으로 ‘낭만’(화목한 명절)을 재현하려는 이 시골집의 가족을 나는 부수고 싶었다고, 형의 핀잔을 들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해가 넘어가고 다시 설이다. 요즈음 종종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비장한 도전자의 억울했던 감정들. 그러나 다시 의문이다. 나는 억울했던 걸까, 아니면 비루했던 걸까. 기껏의 도전이 설거지였다는 점은, 그리고 그조차도 중도실패로 찌그러졌다는 점은, 또 거기에 피로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는 점은, 사실은 기껏 설거지 하나로 비장하게 ‘도전’을 운운할 수 있었던 나를, 그리고 자연스럽게 실패할 수 있었던 나를, 또 그게 피곤하다며 입을 다물 수 있었던 나를 상기시킨다. 그건 남성인 나고, 다시 비겁한 나고, 그게 나를 한없이 비루하게 만든다.

 

추석의 실패는 내 가진 힘의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건 애초에 실패가 아닌 안주였을지 모른다. 나는 남자고, 해서 ‘그래도 되는’ 존재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칠 즈음엔 이번 설을 어떻게 나야 할까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 어떻게 비겁한 나를 최대한 숨겨야 할까, 하는 피로감이기도 하다. 엄마의 난감한 칭찬을, 아빠의 여유 있는 웃음을, 숙모의 당혹한 표정을, 형의 코웃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서 오는 피로를 이기기에 여전히 나는 힘이 없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는 걸까, 의욕이 없는 걸까, 답은 또 묘연하고 혹은 묘연하고 싶고 올해 설은 그래서 더 두렵다.

 

@인디피그

 

2. 그들만의 잔치

 

할머니는 끊임없이 부엌을 서성였다. 아이구, 어찌까, 혹은 아구구구. 추임새처럼 터져 나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달그락 달그락, 나는 그릇을 닦았다. 옆에선 사촌오빠가 내가 건넨 그릇을 물로 헹궜다. 기어코 할머니는 “아이고 그만해라, OO이 고추 떨어진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내내 ‘부엌 안의 손자’만을 생각했기에, 옆에 서 있던 나도, 우리에게 설거지를 시킨 사촌 언니도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추석의 일이다.

 

할머니가 특별히 사촌 오빠를 편애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빠와 내가 함께 부엌에 들어섰던 그 순간, 할머니는 남성이 집안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설거지하면 떨어진다는 ‘고추’는 ‘(가부장적) 남성 권위’를 상징한다. 그 권위가 당신에겐 너무나 당연한 질서였을까. 나는 그 집에서 ‘권위’를 가진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고추 떨어질까 두려운 것인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들을.

 

다가오는 설, 한 친구는 SNS에 “불알러들의 대잔치가 다가온다”고 썼다. 공감했다. 줄곧 명절은 ‘남자들 기 세우는 날’이라 생각했다. 평소 청소와 요리를 도맡아 하는 우리 집 아빠도 명절만 되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차린 밥을 먹고, 여자들이 내준 커피와 과일을 먹으며 “딸은 소용없어. 시집가면 끝이야”란 소리를 했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부터 아빠의 언행은 신랄하게 비판받지만, 명절마다 같은 상황은 합법적으로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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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집Ⅱ, 이순자의 집#1-제사 풍경 2004 ⓒ이선민

 

어릴 땐 그 소리가 상처였는데, 이젠 그냥 화가 나고, 좀 우습기도 하다. 가부장으로 군림하고 싶은 아빠가 부리는 일종의 허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명절만 되면 기가 산다. 진 씨 집안 차례를 진 씨 아닌 (진 씨들‘의’) 여자가 준비하고, 다 차려진 상에 진 씨 자식을 거느리고 절을 올리니, 훌륭한 가부장이 되었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렇게 조상님 모시는 게 중요하면 후손들이 ‘직접’ 정성껏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따져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옛날부터 이래왔으니까, 우리 정서가 그렇잖아.”

 

나는 명절이 싫다. 명절 때마다 그놈의 ‘우리 정서’라는 것이 끈질기고 당당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불쾌한 일이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하물며 집에서는 어느 정도 가사 분담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명절 풍경만큼은 변하는 게 없다. 여성 착취적인 명절 문화는 악습이다. 그리고 그걸 전통으로 포장하는 건, 그냥 지금처럼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명절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다.

 

악습을 바꾸는 건 힘들다. 특히 그 악습에 안주하는 이들의 수가 많고, 나이가 많고, 권력이 많을수록 그렇다. 그래서 종종 ‘괜한 분란 만들지 말고 이틀만 눈 딱 감자’는 내적 유혹과도 싸워야 할 때도 있다. 나도 매년 그걸 경험한다. 부당함을 지적하며 화내는 것보단 ‘귀여운 막내딸’로서 부탁하는 것이 아빠에게 먹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에 자괴감이 든다. 이번 설 풍경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갈 길이 멀다.

 

@달래

 

글. 인디피그(ghin2800@gmail.com), 달래

특성 이미지. 여자의집Ⅱ, 규정과 의순, 명순 정순-네자매 2004, ⓒ이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