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상영일 같은 것은 잘 챙겨두지 않는다. 영화를 놓쳤다면 그렇구나 하고 아쉬움에 보내버렸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은 그럴 수 없었다. 마지막 상영일 전에 이미 봤다. 원래 영화 두 번 보는 건 귀찮기도 해서 잘 안 보지만, <왕의 귀환>은 굳이 봐야 했다.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를 찾았다. 11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면 새벽 3시 반일 것을 계산하고, 영화관 주변에 24시간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예매하고 버스에 올랐다.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 그리고 극장의 하루를 닫는 마지막 영화였다. 포토티켓을 내민 나는 그날의 마지막 영화관람객이었다. 익숙한 상영관이다. 앞서 재개봉한 반지원정대, 두 개의 탑 모두 같은 상영관에서 봤다.

 

53852-2

일주일 간격의 재개봉 ⓒCGV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 그날 마지막 영화의 마지막 관객이 되어 조용히 마지막 광고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상문을 알려주는 광고가 지나가고, 아무도 없는 180석 영화관에서 179개의 빈 좌석과 함께 <반지의 제왕>을 봤다.

 

나는 톨키니스트다(반지의 제왕 팬을 지칭하는 용어). 그냥 우연히 본 반지의 제왕에 빠져들게 됐다. 수 없이 돌려보며 행복해하면서도, 이것을 왜 극장에서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었다. 그러니 최근 반지의 제왕 재개봉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호빗 3부작이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던 탓에 나름의 휴덕(팬으로서 활동 하는 것을 잠시 쉬는 것)을 했다. 이번 재개봉은 그사이 아이돌, 게임 등이 비집고 들어와 한쪽에 잠시 접어놨던 덕심이 폭발하는 계기였다. 너무 많이 돌려봐서일까? 생각보다 극장과 집에서 볼 때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명장면에서 심장이 떨리거나 하는 것은 적었다. 3부작을 극장에서 보며 ‘맞아 난 이걸 정말 보고 싶어 했고, 정말 좋아했지’하는 심정이었다.

 

반지의 제왕을 처음 볼 때와 달리 덕질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매력적인 건 반지의 제왕 속 깊이 있는 얘기들, 그러니까 상징과 의미들이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싶다. 단순히 대단한 판타지 영화라서가 아니라, 등장인물과 배경, 사건에 얽힌 얘기들과 상징을 파헤치는 것이 즐거웠다.

 

톨킨 그 자체로서의 반지의 제왕

 

반지의 제왕이라는 작품은 작가 톨킨이라는 사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배경, 등장인물, 선역, 악역 그리고 사건들은 톨킨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문제의식의 발현이다. 특히 가장 크게 나타나는 점은 톨킨의 노골적인 생태주의적 시각이다. 톨킨은 산업혁명을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기계발전을 굉장히 혐오했으며 공장 굴뚝으로 나오는 검은 연기를 싫어했다. 이런 톨킨의 혐오 정서는 1차 세계대전에 그 원인이 있다. 톨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참호전을 비롯한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톨킨은 전쟁의 원인으로 산업혁명, 기계발전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꼽았다. 그런 톨킨이었으니 그는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악역으로 노골적으로 기계를 등장시킨다.

 

하물며 반지는 어떠한가? 모든 일의 원흉, 악역의 최정점인 반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반지의 가장 강력한 힘은 인간의 욕망을 조종하여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지에 의해 보로미르와 파라미르는 일종의 타락을 경험하고, 보로미르는 결국 반지에 대한 욕망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게 된다. 그 강력하다는 마법사 간달프와 요정 갈라드리엘 또한 반지를 가지고 있어 달라는 프로도의 요구에 자신들은 타락할 것이라며 거부한다.

 

‘팡고른 숲을 모두 베어버려라’
‘물길을 막고 댐을 지어라’

 

53852-3

아름다웠던 아이센가드 (아래) 공장이 된 아이센가드 (위) ⓒ 뉴라인시네마

 

반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타락한 사루만(원래는 간달프와 비슷한 현자다)은 아이센가드 주변의 자연환경을 몽땅 파괴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군사공장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루만은 악 그 자체인 사우론과 연합하면서도, 자신이 사우론을 물리치고 반지를 차지하여 세상의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진다. 그 욕망 때문에 공장이 되어버린 아이센가드에서는 밤새 병력의 대량생산이 이뤄진다. (영화에 사용된 테마곡도 이에 걸맞게 공장에서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사람과 오크의 교배를 통해 더욱 강한 병력인 ‘우르크-하이’를 생산하기도 한다.

 

사루만의 공장으로 변한 아이센가드는 나무들인 ‘엔트’들로부터 공격받고 함락당한다. 사루만의 욕망이 숲을 파괴한 나머지, 숲에 의해 파멸당한 것이다. 이 ‘엔트’들은 반지의 제왕 세계에서 모두 늙었으며 수컷으로 등장하는데 책에서는 또렷하게 암컷 나무들이 어느 날 전부 사라져 우리의 자손이 남을 수 없다며 환경파괴에 대해 강한 비판을 보여준다.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자연에 대한 공격은 결국 자연의 분노를 불러온다는 오래된 교훈을 끌어온다.

 

53852-7

환경파괴에 빡친 나무들에게 공격당하는 아이센가드  ⓒ영화 <반지의 제왕>

 

다시 톨킨 얘기를 해보자면 극단적으로 기계문명과 산업혁명을 싫어했던 톨킨은 혁명 이전의 전원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톨킨의 집에는 세탁기와 티비도 없었다(물론 그에 따른 노동은 톨킨이 직접 하지 않았다. 톨킨의 한계다). 자발적인 공동체 사회를 꿈꾼 톨킨은 아나키스트적 생태주의자 혹은 근본 생태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반지의 제왕이 톨킨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보여준다면, 샤이어(주인공인 호빗들의 고향)는 톨킨만의 유토피아며 호빗은 톨킨이 소설 속에 투입한 자신이다. 반지원정대 1편 확장판에는 샤이어에 대한 더 직접적이고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샤이어는 명백한 농경사회며 호빗들은 대단한 욕망이 없고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맛 좋은 파이프 담배(톨킨은 파이프 담배를 좋아했다)와 차(톨킨은 영국인이었다)만 있다면 행복해 하는 호빗들이다. 호빗족인 프로도가 반지에 대한 욕망을 이겨내야만 하는 운반자로 설정된 이유도 욕망에 대한 톨킨의 거부감 때문이다.

 

골룸은 다시 스미골이 될 수 있을까?

 

톨킨은 ‘욕망’을 절대 악으로 설정했으며 반지가 그것을 상징한다. 반지에 영향을 받은 등장인물들은 모두 타락한다. 가장 큰 타락을 경험한 것은 ‘스미골’이다. 스미골은 피해자다. 순박했던 호빗(엄밀히 말하면 호빗과 비슷한 종족이다)인 스미골은 반지에 지배당해 친구를 살해하고 결국 ‘골룸’이라는 사악한 자아가 스미골을 밀어낸다.

 

53852-4

골룸 ⓒ영화 <반지의 제왕>

53852-6

골룸을 괴롭게 하는 목줄. 프로도는 이것을 풀어준다 ⓒ영화 <반지의 제왕>

 

톨킨은 골룸을 통해 욕망에 지배당한 현대인을 비판하며 보여주었다. 욕망에 대한 광적 이끌림에 의해 점점 초췌해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골룸에게도 다시 스미골이 될 여지는 있었다. 프로도와의 만남에서다. 골룸은 잃어버린 반지를 추적하다가 반지를 지니고 있는 프로도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공격하는 골룸에게 프로도는 그도 반지에 의한 피해자라며 동정심을 느낀다. 온정을 베푼다. 욕망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자가 내미는 온정은 골룸에게 한 줄기 빛이다. 두 개의 탑 초반에 프로도는 골룸을 괴롭히는 엘프의 줄을 풀어준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 반지에 지배당한 골룸을 해방하는 것이다.

 

“영원히 꺼져버려!”

“난 자유야!”

 

53852-5

골룸이 되기 전 스미골의 모습 ⓒ영화 <반지의 제왕>

 

톨킨도 타락한 인간에 대한 희망을 품었을까? 스미골은 골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골룸에게 영원히 꺼져버리라며 일갈하고 정말로 골룸이 사라지자 해방감을 느끼며 골룸에서 스미골로 돌아온다. ‘골룸골룸’거리며 기침하던 것도 멈추는 스미골은 정말로 행복했다. 문제는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 왕국 곤도르의 파라미르에 의해 스미골은 폭행당한다. 프로도를 믿었으나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슬퍼하는 스미골 곁에 다시금 골룸이 나타난다. 해방감과 신뢰는 다시 반지를 탐낸 파라미르에 의해 파괴됐다. 골룸은 다시 스미골을 지배하며, 스미골은 다시금 ‘골룸골룸’하며 울기 시작하고 결국은 골룸에게 완전히 지배당한다. 스미골에서 반지에 의해 골룸으로, 다시 프로도에 의해 스미골로, 인간에 의해 다시 골룸으로 돌아가며 톨킨은 희망과 인간의 약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골룸의 얘기는 그래서 비극적이다.

 

반지의 제왕의 의미심장한 귀환

 

욕망. 톨킨이 그렇게 큰 서사를 그리며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이 오래된 영웅 서사가 지금 시기에 다시 돌아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은 뻔한 영웅신화의 답습이지만, 때론 가장 단순한 이야기가 어떤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욕망에서 비롯된 커다란 일들을 목격하고, 상처받으며 살고 있다. 선과 악의 대립을 목격하는 것이다. 욕망(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호빗들과 반지원정대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굳이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을 보러 간 이유이기도 하겠다. 아무래도 매번 가장 흔한 얘기가 주는 진한 감동을 기대한다. 그 기대를 매번 충족시켜주는 것이 반지의 제왕인 것이다. 언제나 영웅 서사에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승리와 희망. 그것이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일지라도, 안티히어로가 각광받는 시대라도 그것이 가장 위안받기 빠른 길이기에. 그 승리가 극적일수록, 주체인 영웅이 더 작은 존재일수록 받는 위안과 힘은 커진다.

 

53852-1

 

11시에 시작한 영화는 30분의 엔딩크레딧까지 포함해 결국 세 시 반이 넘어서야 끝났다. 분명 덕질에 끝은 없는데, 무언가 끝난 기분이 들어 아무도 없는 불 꺼진 CGV 복도가 더 크게 느껴졌다. 주섬주섬 옷을 정리하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24시 맥도날드로 향했다. 감자튀김 몇 개를 우적우적 먹으며 지갑에서 석 장의 반지의 제왕 포토카드를 꺼냈다. 멍하니 보다가 쓱 웃고 다시 지갑에 넣었다. 마지막 관객, 마지막 영화, 마지막 상영… 마지막으로 가득했던 반지의 제왕 영화를 마무리했다.

 

글. 통감자(200y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