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세대학교의 응원가가 논란이 됐다. 매년 정기전(연고전‧고연전)을 개최하는 연세대와 고려대에는 운동경기를 응원하기 위한 응원가가 있다. 주로 상대 학교를 짓궂게 놀리는 내용이 많다. 이번에 논란이 된 응원가 가사는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다. 고려대 학생은 못생겨서 이화여대, 숙명여대 여학생에게 차인다는 내용이다. 여대를 다닌다는 이유로 고려대생의 여자친구가 되어야 하는 이화여대생, 숙명여대생은 없다.

 

연세대와 고려대 양교에서 응원문화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정기전은 5월에 열리는 축제보다도 인기 있고, 응원은 바로 그 정기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솔직히 응원하려고 연고전(고연전) 간다”는 식의 말도 자연스럽다. 응원문화 위에 공고한 학벌주의와 공기 같은 여성혐오가 더해지면서 정기전과 전혀 무관한 여대 여학생의 대상화가 탄생했다. 그들만의 축제에서 여대 여대생은 완전한 객체로 남는다.

 

 

그 많던 ‘연고대’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객체로 남는 건 여대 여학생만은 아니다. 연세대와 고려대를 다니는 여학생들은 어디에 있을까. 논란이 된 응원가 안에서 못생겨서 차이는 고려대생은 정확히 말하면 고려대 남학생일 뿐이다. (이들이 응원가를 만들면서 동성애자인 고려대 여학생을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동시에 이들은 모든 고려대 남학생을 이성애자로 간주하는 폭력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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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1

 

연세대와 고려대를 다니는 여학생을 향한 대상화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도 있다. 2012년 진행된 양교의 합동 행사에서 한 고려대 응원단원은 연세대 응원가 제목인 ‘토요일은 밤이 좋아’, ‘흔들흔들’, ‘One night only’를 연달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연세대 여학생을 성희롱하는 발언을 했다.

 

여대 여학생 대상화 사례도 수없이 많다. 그 모든 사례에서 연세대와 고려대를 다니는 여학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연세대-이화여대, 고려대-성신여대 식의 저열한 짝짓기 놀이는 너무도 간단하게 연세대와 고려대 여학생을 지우면서 여성혐오를 재생산한다.

 

명예남성이 되거나 고대생이기를 포기하거나

 

고려대에 다니는 여학생인 내게 사실 이런 일은 익숙하다. 고려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문화들은 대개 남성 중심적이다. 응원가를 포함한 응원문화가 그렇다. 군기문화가 깔린, 막걸리를 병 단위로 사발에 부어 마시고 토하게 하는 사발식이 그렇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은 야구, 농구, 빙구, 럭비, 축구 등 모두 다섯 경기가 진행되는데 그 가운데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종목은 없다. 여학생의 자리는 응원석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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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은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 ⓒ 아시아투데이

 

이 과정에서 고려대 여학생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개다. ①명예남성이 되어 이 모든 문화와 기득권을 즐기거나 ②고려대생으로의 정체화를 포기하고 주변부를 맴돌거나. 19년 내내 학벌주의에 젖어있던 나는 고려대 입학 후 곧바로 명예남성이 됐다. 막걸리 2병을 마시고 속을 게워내면서 ‘진정한 고대생’이 되려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혐오의 개념을 알게 된 이후 내 선택지는 ②가 됐다. 새내기 시절 나와 마찬가지로 ①을 골랐던 여자 동기 중 상당수는 수년 뒤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 동기에겐 해당이 없는 얘기다. 학벌과 성별 모두 기득권인 그들에겐 고려대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깨달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개와 고대생 출입금지’의 맥락

 

문제를 알았으니 페미니스트인 채로 졸업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페미니즘을 안 대가가 내가 속한 대학의 학생으로 정체화하는 것을 불편하게 한다면 어딘가 불공평하다. 명문대 학생의 기득권을 누리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집단의 특성이 어떤 집단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쁠 사람이 있을까.

 

말하지 않고 외면하는 건 문제의 유지에 기여한다. 최근 페이스북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신입생이 들어오는 시기를 맞아 ‘재치 있게’ 고려대의 좋은 점을 알리는 제보가 올라왔다. 제보에는 “이화여대 여름학기 축제 참여 기회”라는 언급도 있었다. 왜 뜬금없이 이화여대냐고? 여기에는 ‘개와 고대생 출입금지’라는 맥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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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1996년 이화여대 축제 때 고대생 수십 명이 집단 난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학생의 팔이 부러지기까지 했다. 해당 사건은 후에 ‘여성 공간에 대한 집단 성폭력’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대나무숲 제보 글이 보여주듯 이 일의 폭력성은 지워진 채 “고려대생은 이화여대 축제에 가서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이상한 뼈대만 남아 유통되고 있다. 이런 맥락이 주는 부끄러운 교훈을 끊임없이 말하는 내부자가 없다면 고려대의 남성 중심적 문화는 강화되기만 할 것이다. 졸업을 앞둔 고려대 여학생이 이 글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아레오(areoj@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