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집은 즐거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은 공간이었다. 가건물에서 기숙사로, 고시원에서 아파트로, 가족의 집에서 나의 방으로, 옮길 때마다 ‘집’과 ‘집 속의 나’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상상할 때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것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혼자 살기 1

독신주의자가 꿈이었다. 어린시절에는 ‘어떻게 먹고 살지’보다 ‘어떤 형태로 살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였던 듯하다. 처음 독신주의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서운한 기색을 보이며 “결혼도 안 하고 엄마와도 안 산다는 거구나?”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독신이라는 게 단지 비혼뿐만 아니라 1인 가구의 삶을 의미하는 거였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을 독신주의라는 네 글자로 표현하면 뭔가 있어 보여서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그때부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뿐만 아니라 불안감이 혼재하기 시작했다. 

10대엔 ‘막연한 동경’이 좀 더 컸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타지에 나가 사는 것이 로망이었다. 딱 몇 년만 더 버티자는 생각으로 지루한 십 대 시절을 보냈다. 결국 통학을 하게 됐고 가족 셋이 사는 집에서 우린 참 많이도 싸웠다.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은 가족을 보고 싶어 했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나도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싶었다. 20대 초반의 대부분을 그리워하고 싶지만, 애정은 줄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살았다.

사정이 생겨 1년간 서울에 살게 됐다. 서울의 월세는 상상 이상이었고 ‘혼자 살기’의 꿈을 이루는 건 어려워 보였다. 결국, 셰어하우스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집을 나오되 혼자는 아닌, 반쪽짜리 자취를 하게 됐다. 셰어하우스로 이사하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건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누려온 안온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때로는 배려조차 않는 이들과 공간을 나눠 써야 하는데”, “돈도 부족한데” 하는 걱정 말이다. 

막상 생활해 보니 무엇이든 내가 해놓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당연하게만 여겼던 집 안의 청결이나 화장실의 휴지 따위). 본가에 있던 방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반대로 마치 관 같은 셰어하우스의 방에선 ‘무엇을 버려야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지’에 대한 고민만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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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도시가 아닌 집이었다.ⓒpixabay

서울생활 자체는 좋았다. 서울의 ‘집’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적응해도, 좀처럼 ‘나의 방’, ‘나의 집’과는 화해할 수 없었다. 주말이면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본가로 향했고 그건 내가 생각한 ‘자유로운 삶’, ‘독신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참 이상했다. 본가에 있으면서도 서울의 방에 가고 싶었고 서울에 있는 방에선 본가로 가고 싶었다. 그 두 가지 공간이 동시적이길 바랐다. 가족과의 갈등을 끝내고, 독립적인 ‘나’로 거듭나고 싶은 한 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다.

본가와 셰어하우스 그 어디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공간에서 나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서울 생활을 시작한 후 ‘독신주의의 꿈’은 그 의미가 더 흐릿해져 버렸다. 단순히 비혼을 뜻하는지, 완전히 혼자 사는 것을 뜻하는지, 가족과 배우자만 아니라면 누구와 살든 상관없다는 건지, 모호할 뿐이다. 1년간의 자취 생활이 반쪽짜리였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완벽한 자취’ 생활을 했을 때는 꿈을 이룬 느낌을 받을까?

결국, 혼자 살기에 실패한 셈이다. 독신주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체험했다.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완전히 사라졌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아직도 혼자 살기에 성공할 것을 기대한다. 어른이 되고 싶지만 보살핌은 받고 싶고, 혼자가 되고 싶지만 동시에 ‘함께’의 삶을 살겠다는 욕심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욕심을 버려야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겠다는 기대. 이 기대가 있는 한 혼자 살기에 대한 환상은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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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서 서울 근교 신도시에 새 아파트를 하나 샀다. 새집증후군이 몸에 안 좋다는 뉴스가 나오자 엄마는 창문 샷시 공사도 덜 된 집에 양파와 고무나무 화분을 갖다두었다. 집은 넓고 깨끗하고 아늑했다. 내 방은 한쪽 면 전체가 창문이라 주말이면 늦잠을 못 잘 만큼 해가 잘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생일에 엄마 아빠가 선물로 크고 하얀 공주풍의 원목 침대를 사줬다. 나는 그 점에 약간 삐졌었다. 수능이 끝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을 꾸밀 생각이었다. 낮은 침대와 낮은 책장과 러그를 깔고 외국 인테리어 사진에 나올법한 방을 만들려고 했던 계획은 큰 침대가 들어오면서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어쨌든 그 침대는 푹신하고 포근했다. 거실과 부엌 창문을 열면 맞바람이 들어서 환기를 시키면 집이 금세 상쾌하고 보송해졌다.

시간이 흘러서 대학에 갔다. 몇 년간 통학하면서 왕복 서너 시간 동안 버스를 타는데 지쳐 자취를 시켜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서울 한복판에 엄청 작은 오피스텔의 방을 얻었다. 창문은 너무 작은 데다 문을 열어도 뒤에 건물이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침대를 넣기에는 방의 크기가 모호해서 싱글 사이즈 매트리스를 하나 사서 깔았다. 정작 집에 있는 예쁜 침대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도 못 자고 나머지는 차가운 바닥에 매트리스 한 장에 뽀송뽀송하지 않은 이불을 덮고 잤다. 친구들한테는 그 오피스텔은 집이 아니라 방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시간이 더 흘러서 얼마 전, 아빠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전라도 광주에서 아빠는 월세 50만 원의 오피스텔에서 살 거라고 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 가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십수 년 동안 아빠가 돈을 번 이유는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세 대출을 하고, 전세금을 갚고, 또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그 대출을 갚기 위해 일했다. 아빠의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는 전부 집을 사는 과정이었다. 그 집에는 이제 아빠도 없고 나도 없다. 비어있을 집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벌었나. 이제 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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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집은 그 자체로 외로웠다. ⓒpixabay

아빠가 떠나기 전날, 캐리어에 아빠 짐을 싸놓고 다 같이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이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빠는 쿨하게 원래 때가 되면 헤어지는 거라며 맥주를 마셨다. 그게 쿨한 척이라는 걸 잘 안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아빠는 오늘 오니?라고 전화를 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저녁에 자취방으로 바로 갈 거라고 말했는데도 올 거냐고 문자를 보내고, 집에 가니까 방에 보일러가 켜져 있었다. 안 온다고 했는데 왜 켜놨냐고 물어보니까 혹시 집에 올까 봐 그랬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이상해서 방에 들어와서 혼자 울었다.

글. 샤미즈(ndhhdm9019@naver.com), 유디트(ekitale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