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깜빡한 것이었다. 그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냥 깜빡했기 때문이다. 친구와 집 앞 카페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벌써 브래지어를 벗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벗은 브래지어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속옷 안 입은 거 티 났어?” 카페에는 여자 직원이 있었고 내 옆자리엔 커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이 눈치챘을까? 아니야. 나를 이상하게 보았던 사람은 없던 것 같은데.’ 계속 기억을 더듬다가 몰랐다는 친구에 답장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왠지 모르게 브래지어가 나를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입고 나갔겠지만 어제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브래지어를 입는 대신 옷을 하나 더 껴입기로 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감은 사라졌다.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어깨를 움츠리고 손으로 옷을 잡아 부풀려서 가슴을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옷을 세 겹 네 겹 덧입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평소 자세가 구부정해서 그런 것인지, 일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 후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아무도 노브라를 지적하지 않았고(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알아보았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노브라로 다녔다고 세상이 뒤집어지지도 않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몸 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호흡을 방해하는, 특히 숨 막히는 지옥철에서 더 갑갑하게 했던 브래지어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브래지어를 손빨래하는 귀찮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딱 그 정도이다.

 

 

종로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달라붙는 옷을 입고 노브라로 나가기에는 겁이 났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입고 나갔다. 카페에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이거 봐” 한 친구가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여줬다. 그 속에는 연보라 원피스를 입은 설리가 서 있었고 흩날리는 원피스 위로 노브라의 흔적이 드러났다. “미쳤나봐. 진짜 왜 저래?” 그것을 본 다른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노브라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을 들으며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브래지어를 입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3961-2

흥… ⓒ SBS

 

 

미친것도 누구를 잘못 만나 이상해진 것도 혹은 누군가에게 성적 어필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 있는 운동의 하나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추운 겨울에 겹겹이 입은 두꺼운 옷들 속에서 숨통을 조이는 와이어가 싫었고 뜨거운 여름에 브래지어 사이로 흐르는 땀도 싫었다. 그냥 편해서 노브라를 택했다. 그냥 브래지어를 입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 뿐인데,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하는 걸까.

 

 

며칠 뒤 강남에서 회의가 있었다. 지난번의 일이 떠올라 두껍고 펑퍼짐한 옷을 입었음에도 브래지어를 입고 갔다. 그나마 덜 불편한 노와이어 브래지어를 입었고 다행히도 강남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큰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시간이 남아 영화를 보러 갔다. 상영관에 들어가 맨 끝 구석에 있는 좌석에 앉자 곧 불이 꺼졌다. 갑자기 미칠 듯이 답답해졌다. 몸을 아무리 비틀어보아도 나를 조이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후크를 풀었다. 옆 사람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브래지어를 어깨에 걸친 채로 집에 갔다. 후크를 다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2달여간의 일탈은 끝이 날 것이다. 다시 서랍에서 브래지어를 꺼내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막막하다. 다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사실 며칠 참으면 금세 적응될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제는 왜 참아야 하는지, 왜 브래지어를 벗으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글. 호빵맨(0103hyemin@gmail.com)

대표 이미지. The Huffington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