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득분위는 9분위다. 하지만 돈을 빌리거나, 벌거나, 여타 획기적 방법을 통해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는 부모님께 내 등록금을 충분히 내줄 돈이 있다고 하는데, 부모님은 그럴 돈이 없다고 하시니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국가 장학금은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지만, 9분위의 삶이 이렇다면 소득분위의 책정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장학금?

 

 

국가가 장학금을 지급하는 목적은 모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부모의 소득과 관계없이 학생이라면,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정책이다. 합의된 전제가 하나 더 있다. 학생의 교육권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가 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부모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검증한 후에야 개입한다.

 

 

부모가 무능력한 경우에 한해 ‘선별적 지원’을 실시하는 근거는 장학금 지급이 약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더욱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우선으로 혜택을 주는 것이 수혜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계산은 이러한 인식에 그럴듯함을 더한다. 그런데 ‘권리’가 약자라는 자격을 보여야 누릴 수 있는 것이었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나는 매학기 높은 소득분위에도 불구하고 교내 장학금이 필요한 이유를 구구절절히 써서 제출해야 한다. ⓒ 한겨례 김한민

 

 

권리의 보장은 국가의 의무다

 

 

우선 수혜자를 위해서라는 논리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가난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수치심, 행정 절차상으로는 곤궁이 실제만큼 포착되지 않아 생겨나는 사각지대의 고통 등 ‘선별’의 많은 문제점은 숱하게 지적되어왔다. 대안으로서 ‘보편’의 모색은 “내 세금을 돈 많은 애들한테 쓸 수는 없다”는 거부감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비난은 반감의 벽을 더욱 높게 쌓아 올렸다.

 

 

부모가 돈이 많으면 가구 차원에서 자녀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으므로,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부모가 돈이 적은 경우에는 교육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못함을 국가가 동정하여 도와주는 것일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지만, 결과적으로는 차별적인 시선을 낳고 있다. 국가는 교육받을 권리를 ‘누구에게나’ 보장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에 비용을 부담한다는 접근이 필요하다. 

 

교육권은 기본권이다  

 

 

한국과 같은 학력 지상주의 사회에서 교육받을 권리는 삶의 질과 직결된다. OECD에서 발표한 2012년 자료에 따르면, 고등학교 졸업자 평균 임금을 100이라고 했을 때, 전문대학 졸업자는 116, 대학 졸업자는 161을 받았다. 교육부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의 평균 대학 진학률이 71.2%에 달한다고 밝혔다. 대학 진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선택’이 아니라 평균 이하의 생활로 내몰리지 않기 위한 ‘필수’다.

 

 

다들 대학에 가는 사회에서 대학교육은 개인의 선택일까? ⓒ 한국일보

 

 

대학 밖 학생을 배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대학 등록금 대신 자신에게 맞춤한 교육에 투자해도 넉넉한 삶을 꾸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다만 대학교육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대학교육을 필수로, 그것도 매우 비싸게 설정해놓은 데 대한 비용을 함께 부담하자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현재의 국가 장학금 제도 또한 나름의 성과다.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기 벅찬 형편보다 등록금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사실을 직시하고, 해결을 요구한 결과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한발 물러선 채 부모가 우선적인 책임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책임에 방점이 찍혀 있다. 국가가 더는 부모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제 주장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께서 하셨던 공약 ⓒ 이상윤

 

 

내 삶이 지속가능한 사회로

 

 

국가가 대학 등록금을 전부 책임지면 물론 좋겠지만 예산상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며, 순진한 이상에 불과한 논의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예산은 고정된 현실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돈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의 반영이다. 국가 장학금 제도가 생겨났을 때처럼, 사회가 개인의 권리를 함께 보장하겠다는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 예산 조정의 첫번째 발판이다. 

 

 

지금 당장 대학 등록금을 폐지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학비지원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야 받는 것이 아니라 누려야 마땅한 권리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면 조금씩 상상은 해볼 수 있다. 개인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의 몫을 늘려가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을 찾을 길도 열린다. 국가가 보조하는 반값 등록금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겠다. 

 

 

교육받을 권리의 보장, 이를 위한 등록금의 ‘보편적 지원’은 엉뚱한 데 남 좋으라고 쓰이는 돈이나 예산낭비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데 건강한 사회가 지속될 수는 없다. ‘교육받을 권리’의 보장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다. 모두가, 9분위 조차 등록금에 허덕이는 ‘헬조선’에서 같이 사는 삶을 선택해보자는 제안이다.

 

 

 

 

글. 진(bibig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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