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의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화제다. 이어서 가지를 비롯해 수많은 음식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오이가 나쁘지는 않다. 비판받는 당근이나 가지도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런 모임들이 반갑다. 자신들이 당했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통쾌하다. 그 재료가 들어간 음식 자체가 죄는 아니라고 믿지만 죄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 말들을 봐도 유머와 분노가 섞였음을 알기에 기분 좋게 넘길 수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캡처

 

 

입이 짧아서 괴로웠다

 

 

어린 시절 입이 짧은 편이었다. 당시에는 ‘사람은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못 먹는 것도 많았고 안 먹는 것도 많았다. 조금 특이하면 먹지 않았다. 그 때 먹을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나름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으면 충분히 만족했다. 그에 대해 주변의 어른들 시선은 달랐다.

 

 

그것도 먹지 못하면 어떡하냐, 어른이 되려면 그런 것 다 먹어야 한다, 먹는 ‘꼬라지’가 그래선 안 된다, 그 음식은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등등의 꼬집기가 날아들었다. 친척들끼리 모여서 이것저것 차려놓고 밥을 먹을 땐 그 순간이 고역이었다. 저녁에 그런 식사가 있다고 하면 일부러 배를 최대한 많이 비우고 그들의 기준에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하려고 과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그들이 배를 다 채우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너는 더 먹어도 돼” 혹은 “너는 더 먹어야 해”라며 억지로 먹였고 “건강을 위해 이런 것도 먹어야 해”라며 내 그릇에 이것저것을 더 얹어주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이라고 했는데 즐겁지 않았다. 숟가락을 드는 행위 하나하나에 날아드는 눈초리가 두려웠고 맛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때로는 구역질이 나는 음식들을 삼켜야 했다.

 

 

먹지 못하는 음식을 먹는 방법도 다양했다. 씹는 걸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동시에 어른들이 보기에 자연스러워야 했다. 억지로 먹는 것 같으면 맛을 들여야 한다면서 더 주었으니까. 그 ‘음식’을 먹기 전에 다른 것들을 허겁지겁 집어먹고 그 음식을 마지막에 욱여넣고는 물을 잔뜩 먹었다. 꿀꺽 삼키면서도 토악질이 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 느낌을 보이는 순간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그딴 식으로 먹을 거면 집어치워라”는 이야기는 지긋지긋했다.

 

 

남들이 즐겨 먹는데 먹지 않는 것에는 커피와 술도 있다. 카페인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너무나 어지럽고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취해버려서 마시지 않는다. 그에 앞서 좋아하는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전 세계 수십 억의 인구가 커피를 즐기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사회생활이 술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몸이 싫다는 데. 이 좋은 것을 모르다니! 정도는 기분 좋게 넘길 수 있을 정도다. 거부했음에도 권하거나, 한심한 부적응자 쯤으로 바라보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누구는 좋아서 하는 줄 아냐. 네가 사회생활을 모르는 거다’라는 말에는 ‘당신도 싫으면서 왜 나에게까지 간섭질이세요’라고 쏘아붙이고 싶다.

 

 

내가 싫다는 데 왜 먹이냐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먹느라 힘든 짱구. 남 얘기가 아니다. ⓒ<로봇아빠의 대역습>, Usui Yoshiro/Futabasha

 

 

지금은 먹지 못하는 음식들이 많이 없어졌다. 먹는 행위의 즐거움을 알았고, 이제는 너무 많이 먹는 걸 조심해야 할 정도다. 그를 두고 “거봐라, 어릴 때 그렇게 억지로라도 먹으니까 먹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억지로 먹어서 나아진 게 아니라 입맛이 바뀌었고 고정관념 없이 먹는 시도 덕에 나아졌다. 억지로 먹었던 음식들은 트라우마가 생겨 여전히 먹지 못하기도 한다.

 

 

남이 싫다는 것, 먹지 못한다는 것을 억지로 먹이는 건 분명한 폭력이다. 상대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먹지 못한다는 사람에게 “그래도 한 번 먹어봐라”고 선심 쓰듯이 말하는 건 선심이 아니다. ‘그래도 한 번만 맞아봐라’라고 하면 맞아볼 사람은 없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가리는 사람보고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할 게 아니다. ‘남이 싫다는 데 왜 네가 난리냐’고, ‘둔감하다’고 비판할 일이다.

 

 

 

하고 싶은 말. ⓒMBC 무한도전

 

 

어떤 음식을 먹는 건 순전히 취향의 영역이다. 우유송과 당근송이 아무리 우유와 당근을 찬양해도 싫은 건 싫은 거고 못 먹는 건 못 먹는 거다. 사는 게 피곤한 이유는 별 게 없다. 싫어하는 음식을 가려내야해서 피곤한 게 아니라 무슨 음식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까지 간섭하고 강제하려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하기에 피곤하다. 오이를 먹지 않으면 뭐 어떤가. 당신 냉면에 들어 있는 오이를 빼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그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가 싫다는 게 뭐 어떤가.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싫어하는 게 있고, 싫어하는 걸 피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우리에게 그 정도 자유는 충분히 있지 않나.

 

 

 

글. 감언이설(gchhg2005@naver.com)

특성이미지. ⓒ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