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트렌디 드라마.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단어는 현재 한국드라마에서 실재하는 단어다. 홈드라마와 대비되어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지만 청춘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다. 새로운 플롯과 소재를 추구하는 척하지만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오히려 반복되는 패턴은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모습을 내비친다. <힘센 여자 도봉순>은 이 모든 요소를 만족하는 트렌디 드라마다.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는 카피 문구와 함께 주체적인 여성상을 내세우는 듯했으나 드라마는 여성혐오와 성 소수자 혐오로 가득하다. 그 장면은 도봉순만의 장면이 아닌 한국드라마의 장면이기도 하다.

 

 

여성 대상 범죄는 그저 ‘소비’된다

 

 

드라마의 기본 설정은 도봉순의 초인적인 힘이다. 그 설정을 보여주기 위해 드라마는 도봉순처럼 힘세지 않은 여성들이 겪는 범죄를 전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하철에서 추행당하는 여성이 있다. 여성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며, 카메라는 성추행범의 손이 여성의 엉덩이에 닿아 있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그걸 본 도봉순은 정의감에 불탄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심성의 소유자인 도봉순을 설정하기 위한 장면이다. 시청자들은 안다. 우리의 주인공 도봉순은 그런 불쾌한 경험 앞에 무력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도봉순이 주인공이고 추행당한 여성이 카메오인 이유다. 도봉순처럼 괴력을 가지지 않은 여성들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불쾌한 경험을, 불쾌한 연출로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특별하지 않은 여성의 자리로 내몰릴 뿐이다.

 

 

드라마 속 살인 장면 ⓒtvN

 

 

밤늦은 골목길, 혼자 걷는 도봉순의 뒷모습이 보인다. 꼭 누군가 뒤따라 가는 것 같은 카메라 움직임이고 배경음악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도봉순이 뒤돌아봤을 때, 뒤에는 아무도 없고 장면은 곧 다른 여성의 뒷모습으로 넘어간다. 그 여성은 살해당한다. 극 중 인물들에게 살인마가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드라마는 몇 명의 여성을 살해한다. 치즈인더트랩이라는 웹툰 이후 로맨스릴러(로맨스와 스릴러의 합성어로 로맨스 장르에 연쇄살인 등의 스릴러 적 요소를 일부 끼워 넣은 것)가 유행함에 따라 가벼운 연애담에 불필요한 여성 살해, 여성대상 범죄가 양념처럼 끼얹어졌다. <식샤를 합시다 2>에서도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스토킹이 다뤄졌지만, 그 부분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는 못했다.

 

 

반문할 수도 있다. 그저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젠더사이드 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묻고 싶다. 현실 반영의 목적은 무엇이냐고. <도봉순>에서 추행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성을 비춤으로써 여성 대상 범죄에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던지나? 아니다. 그저 일상의 젠더 폭력을 가져와 주인공의 캐릭터 성을 부각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그것도 교묘한 연출로 범죄를 포르노적으로 소비하면서.

 

 

한국 드라마는 사실상 여성 대상 범죄의 ‘2차 가해 판’ 같은 느낌이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악역이 유행하더니 공장에서 찍어낸 듯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은 악역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에게 살해당한 건 여성이었다. 그 여성들은 왜 살해당했나. 살인마가 나빠서? 아니다. 살인마는 너무나 매력적인(듯이 보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작가와 감독은 살인마가 왜 사이코패스가 될 수 없었는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사연이 없는 건 살해당한 여성들뿐이다. 사연 없는 여성들의 시체 위에서 사이코패스와 주인공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성애 중심주의는 성 소수자를 혐오한다

 

 

극 중 도봉순은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민혁이 국두를 좋아하는 게이라고 오해한다. 민혁은 봉순에게 호감이 있고 국두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 소수자라는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는 구조도 한숨이 나오지만, 더 경악스러운 장면이 있다. 봉순이 자신의 엄마에게 “그 남자(민혁) 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왜 하필 게이인가? 정말 민혁이 국두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그의 성 정체성은 게이로 한정되지 않는다. 동성을 좋아하면 레즈비언 혹은 게이라고 쉽게 판단되는 상황에서 바이섹슈얼을 비롯한 여타 성 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진다. 둘째, 봉순은 왜 아웃팅을 하는가? 민혁이 게이였다고 가정하면 봉순의 행동은 엄청난 폭력이다. 그럼에도 극 중 상황은 그저 유쾌한 듯이 표현될 뿐이다. 수많은 성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아웃팅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도록 미디어가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셋째,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 소수자를 소환하는 방식이 2017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부터 시작해 <바람의 화원>, <성균관 스캔들>을 거치며 남자 주인공이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다 상대가 남장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심하는 서사는 계속 이어져 왔다. <도봉순>이 짐짓 새로운 척하지만 고리타분한 부분이 이 지점이다. 성별과 상황만 다를 뿐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이 끼어든다면 두 주인공의 애정에 걸림돌이 된다고 못 박는 건 여전하다.

 

 

 커피프린스 1호점 ⓒMBC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

 

 

극 중 민혁은 게임회사 대표이고 봉순은 민혁의 보디가드로 고용된다. 민혁은 게약서를 작성하자마자 말을 놓겠다고 한다. 자신이 고용주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선 두 사람의 권력 차가 느껴지는 반말, 존댓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간의 한국 드라마를 보면 이러한 권력 차 높임말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권력 차라는 건 신분과 젠더가 맞물린 차별이다. 트랜디 드라마 속 여성 인물은 어느 정도 커리어가 있는 사람들임에도 반말 존댓말의 차이는 여전하다. <보이스>의 진혁(장혁)이 권주(이하나)에게 반말을 하지만 권주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이 한 예다.

 

 

ⓒOCN

 

 

언제나 남편에게 존대하는 아내의 모습은 이미 주말 드라마의 클리셰가 됐다. 남성에게 존댓말 하는 여성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트렌디 드라마가 그러한 보수성을 신분 차를 빌미로 내세운다. 수많은 트랜디 드라마가 신데렐라 스토리의 중심 골자를 답습하는 것.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도깨비’ 속 설정처럼 하다못해 나이 차라도 심하게 나는 것. 이것은 필연적으로 여성이 존댓말을 사용하게 해 기본적인 대화부터 불균형을 심어주는 작업에 불과하다.

 

 

엄마를 사랑한 아들

 

 

영화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 ⓒUniversal Studio

 

 

영화 <올가미>를 처음 보던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 <싸이코>의 베이츠가 자신의 어머니로 인격이 변하는 장면도 생생하다. 엄격하고 포악했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아들. 그 모습은 호러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올가미>와 <싸이코>. 잘못한 사람은 명백히 엄마이다. 아들을 자신의 애인쯤으로 생각하는 엄마, 아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엄마, 이런 엄마는 응징의 대상이고 공포의 대상이다.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오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은 어떤가? 아니 적어도 현재 한국 미디어에 비치는 ‘모성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아들은 어떤 모습인가? 그들에겐 어떤 책임이 뒤따르나?

 

 

그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돌봐줄 필요가 있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대상으로 비친다. 그들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오히려 그런 불쌍한 이들을 구제해줄 ‘똑소리 나는’ 여성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한다. 민혁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봉순에게 밥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봉순이 생과일 음료수를 가져다주지만 ‘밥을 달라’며 징징거린다. 결국 봉순이 밥상을 차리고 떠난다. 민혁은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서 음식을 한 입 맛보더니 “우리 엄마가 해준 것 같네”라며 서글픈 눈망울을 한다. 여기서 여성 시청자의 제스처는 어떠해야 하나? 명백하게, 그에게 “모성애를 느끼라”고 강요당하고 있다.

 

 

아들과 분리되지 못한 엄마 역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만, 엄마와 분리되지 못한 아들을 마음의 상처가 있는 남자주인공으로 그리는 것은 더욱 이상하다. 엄마의 빈자리를 여성주인공이 채워야 한다는 듯이 흘러가는 스토리도 소름 돋는다. 멋진 남자 주인공이 실은 엄마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 살아왔던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은 더는 멋있지 않다. 불쌍하지도 않고 모성애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연애 상대인 여성은 엄마의 대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한국 드라마는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창작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제시한 클리셰를 법적으로 금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작가와 감독이라면, 그것도 트렌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게을러서는 안 된다. 당신들이 ‘청춘’이라고 지목한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고리타분한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성 소수자혐오, 여성 혐오적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건 트렌드를 읽지 못한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글. 샤미즈(ndhhdm9019@naver.com)

특성이미지.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