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고함20>은 3주기를 맞아 직접 목포신항과 팽목항을 방문했습니다. 세월호가 인양 되는 그 기억, 3년이 되는 기억을 항구라는 장소에서 직접 담는 것에 더해서 우리가 왜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세월, 3년]은 세월호 3년의 기록이자, 우리 모두가 지났던 3년의 세월에 대한 기록입니다.]

 

돌이켜 보면 2011년, 그해 여름 장마는 유별났다. 7월 27일 그 날도 비는 멈출 줄 몰랐다. 참사는 그 유별난 장마 속에서 발생했다. 아침에 들려온 뉴스는 충격적이었다. 인하대학교 소속 발명 동아리가 자원봉사를 하러 떠난 춘천에서 새벽에 발생한 산사태에 1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장마에 지반이 약해져 산사태가 발생했고, 학생들이 묵던 숙소를 그대로 덮친 것이다. 내가 그 학교 학생이란 것을 알고 집으로 걸려오는 친척들의 전화, 고등학교 친구들의 카톡으로 그 날을 시작했다.

 

 

 

사고를 앞둔 26일 21시 25분, 이미 마적산에는 산사태 위험주의보가 발령됐다. 그러나 춘천시는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27일 00시 08분에 1차 산사태가 발생했다.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묵었던 민박에서 100m 떨어진 곳이었다. 이미 지역 주민들은 서로 전화를 하면서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인하대 학생들은 그때까지도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농어촌민박사업에 따르면 민박집은 무조건 주인이 함께 거주해야 한다. 학생들이 머물렀던 숙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인은 별도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00시 20분, 2차 산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산사태가 휩쓴 민박의 모습 ⓒ연합뉴스

 

 

 

 

참사가 발생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조사위는 2번의 회의를 끝으로 해체됐다. 춘천시의 태도 변화가 큰 이유였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춘천시는 진상 규명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시는 조사를 위해 필요한 용역비용 1억 원을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조사위는 진상 조사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자체적으로 대책위를 꾸려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는 춘천 산사태가 명백한 인재였음을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춘천시는 산림청의 산사태 위험 경보를 무시했다. 위에서도 나왔듯이 산림청은 이미 산사태가 발생한 지역을 산사태 위험(주의보) 대상 지역으로 지정하고 경고 문자를 발송했다. 하지만 대피령을 비롯한 어떠한 조치도 행해지지 않았다. 해당 지역이 국립산림원이 지정한 산사태 위험 1등급 지역임을 고려한다면 춘천시의 대처가 미흡했음을 알 수 있다.

 

 

산사태 지역의 토양 또한 문제였다. 당시 토양의 상태는 폭우가 쏟아질 경우 물과 함께 쓸려 내려올 위험이 컸다. 하지만 건축물 허가는 이와 상관없이 이뤄졌다. 방치돼있던 산 중턱 방공포 진지는 물 창고가 되어 더 큰 피해를 불렀고, 당시 상황을 알려줄 주인은 민박에 없었다. 허술한 경보체계, 마구잡이식 건축 허가 등이 결합해 희생자는 발생했다.

 

 

 

조사위 해체를 비판하는 유가족을 향한 눈초리는 상처로 남았다. 당시 진상 규명을 위한 시위에 참여하러 춘천에 갔다. 집회의 마지막 장소는 춘천시청이었다. 공무원들은 시위하는 유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정치적으로 죽음을 이용하지 마라.”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희생자를 향한 온라인에서의 조롱이었다.

 

 

 

‘급도 안되는 인하대학교가 무슨 자원봉사를 하러 갔냐.’, ‘자원봉사는 무슨 술 마시다 취해서 탈출하지 못한 거지.’

 

 

 

ⓒ 연합뉴스

 

 

 

2011년 춘천시는 사고에 대한 진상 규명을 철저히 하고 안전 사회를 만들어야 했다. 당시 유가족들의 주장 역시 그것이었다. 진상규명을 통해 더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상식 말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에 소홀했다. 반성은 없었고, 망각은 쉬웠다. 진상 규명 위원회는 아무것도 못 하고 해체됐고,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유가족에게 비난이 돌아왔다. 그리고 3년이 지나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할 때면 춘천 산사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선박회사의 과적, 노후화된 선박, 불법적인 배 증축과 국가의 허술한 관리 감시로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둘 다 ‘막을 수 있던’ 인재였다는 점이다. 더해서 특별 조사 위원회가 정부에 의해서 해체됐다는 점, 유가족들을 향한 비난까지도 세월호 참사는 춘천 산사태 사고와 판박이다.

 

 

 

안전사회는 가능할까?

 

 

 

한국은 시스템 문제로 발생한 많은 사건을 지났다. 그런데도 구조적 변화는 없었다. 그 사실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한동안 세월호는 가짜뉴스의 표적이 됐고, 유가족은 시체 팔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유가족이 자신의 분을 못 이겨 내뱉는 감정적인 발언들은 일부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이 알려지면서 다시 세월호 문제를 다시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하지만 단순히 희생자를 추모하는데 그칠 수 없다. 안전 사회를 시작할 때이다. 다시 기쁜 마음으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우리가 참사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지에 달려있다. 세월호가 3주년이 지났고, 춘천 산사태는 3년을 돌아 다시 3년을 지났다. 세월호는 인양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이후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 

 

 

 

 

글. 이스국(seugwookl@gmail.com)

특성이미지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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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이승원, 네 꿈을 기억할게: 춘천봉사활동 인하대희생자 투쟁 이야기, 한내,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