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여성들은 차별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을 목격하며 불편함은 분노가 되었다. ‘살아남을 권리’를 외치기 위해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제 페미니즘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여성들이 ‘나의 불편함이 사소한 것이 아닐까’ 망설일 때,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문구는 이들이 입을 열고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간 한국여성의전화가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최근 한국여성의전화는 ‘1OF10000TO10000OF10000’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들고 텀블벅에서 소셜 펀딩을 시작했다. 5월 16일 현재 텀블벅 모금액은 181만 원으로 목표액의 120%를 달성했다. 어떻게 시작한 프로젝트일까.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1주기 하루 전인 16일, 한국여성의전화 정(활동명)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10000명 중 1명에서 10000명 중 10000명으로

 

 

가정폭력 가해자 은팔찌 채우기 기원 팔찌 프로젝트 ⓒ한국여성의전화

 

 

– 프로젝트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텀블벅 프로젝트는 한국여성의전화의 정기 캠페인의 일환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여성폭력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3월에는 여성의 날, 5월에는 가정 폭력 없는 달, 11월에는 가정폭력 추방의 달을 맞아 연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번 텀블벅 프로젝트는 5월 가정 폭력 없는 달에 관련된 캠페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에서는 97년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졌지만, 법 제정 이후에도 실효성은 없다는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 은팔찌 디자인이 굉장히 재미있는데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인가요?

 

 

“저희들끼리 캠페인 기획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가정폭력 문제 근절에 있어서 당사자나 주변인, 가해자의 인식 개선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늘 곁에 두고 이런 문제를 상기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팔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는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고, 또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디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가해자에게 채우는 은팔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팔찌에 ‘1OF10000TO10000OF10000’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던데, 어떤 의미인가요?

 

 

“‘1OF10000TO10000OF10000’은 가정 폭력의 신고율이 1.3%에 그치고, 그중에서도 구속되는 가해자는 1.3%에 불과하다는 현실에서 착안한 문구입니다. 1만 건의 가정폭력이 일어났을 때, 1명의 가정폭력 가해자만 구속되는 거죠. 1만 명의 가정폭력 범죄자가 모두 제대로 수사되고 처벌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 텀블벅을 통한 수익금은 어떻게 쓰이게 되나요?

 

 

“수익금은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운영하는 가정폭력 근절 활동에 쓰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저희가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상담소를 운영하는데요, 여기에서 피해자에게 전화상담, 법률지원, 의료지원 등을 제공하는 데 쓰이게 됩니다. 또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도 운영하는데요, 여기에서의 숙식과 치유프로그램, 취업교육 등 자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쓰이게 됩니다.”

 

 

그것은 ‘몹쓸 짓’도 ‘실수’도 ‘사소한 일’도 아니다

 

 

– 가정폭력은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목격이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일어나는지 가늠이 잘 되지를 않는 것 같은데요, 가정폭력이 실제로 얼마나 발생하나요?

 

 

“2013년 여성가족부에서 진행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두 집 중 한 집에서 가정폭력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가정폭력은 매우 흔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정폭력이라고 인지하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가정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만약에 국민의 절반이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엄청난 사회문제고 당장 근절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겠죠? 그런데 가정폭력은 그 심각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희가 자주 하는 말 중에 가정폭력을 근절하면 사회 절반의 폭력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정폭력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 또 가정폭력은 친밀한 대상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해도 이게 폭력이라고 인지하기가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가정폭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나요?

 

 

“저희는 가정폭력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고 있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폭력은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납니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매매, 성폭력, 스토킹이 모두 여성폭력의 일종입니다. 또 그 양태는 언어적, 정서적, 경제적, 성적, 신체적인 폭력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감시나 통제, 폭언, 갈취, 협박, 폭행, 상해, 납치, 감금, 살인미수, 살해 등 수많은 것들이 포함되고요. 이 밖에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폭력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성폭력은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다 ⓒWomen’s aid

 

 

요즘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데이트폭력 같은 경우에도 저희가 2009년부터 얘기를 해 왔거든요. 최근에 데이트폭력이 이슈화되었고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이 생기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이슈가 되지 않은 폭력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성 당사자가 폭력을 경험했을 때 스스로도, 혹은 주변에 시각에 비추어보아도 이게 폭력이 맞는지 헷갈릴 수가 있어요. 너무나 흔하고 사적인 문제라는 인식 때문에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라는 한국여성의전화의 카피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혹은 사회적 인식 때문에 신고나 상담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거나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낄 때 바로 도움을 청하거나 조치를 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폭력을 넘어서 변화의 주체로

 

 

– 여성폭력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확히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요?

 

 

“여성폭력은 1993년 유엔에서 제정한 여성 폭력 철폐 선언에 등장한 개념입니다. 여기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oence against women)을 ‘공사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게 신체적, 성적, 심리적인 피해나 고통을 유발하거나,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종류의 젠더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가정과 사회 내에서의 신체적, 성적, 심리적 폭력, 인신매매, 성희롱뿐 아니라 협박, 강압까지도 여성폭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정폭력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모두 여성폭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 여성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살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여성들이 이러한 폭력을 가장 피부로 느꼈던 것은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에서 ‘여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다른 살인과 마찬가지로 강자가 약자를 살해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정 폭력을 ‘여성’의 문제로 보고, 여성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 이것은 여성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질환이 있는 개인의 문제라거나, 화장실의 문제라는 등 본질을 흐리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사회의 성차별과 여성폭력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조차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성폭력은 성차별의 극단적인 형태이고, 동시에 성차별을 강화하는 수단입니다. 여성폭력이 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적으로 접근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94년에 성폭력특별법이, 97년에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에서는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여성에 대한 문제나 성차별적 문제라고 보는 시각이 전무합니다. 문제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법이 제정된 지 20년 지나도 실효성이 없는 상황입니다.”

 

 

강남역 사건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 ⓒ경향신문

 

 

–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 이름 붙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여성주의 내에서 가정 폭력을 아내 폭력, 아내 구타로 바꾸어 부르자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맞아요. 한국여성의전화에서도 아내폭력, 아내구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80퍼센트가 여성이거든요. 가정폭력을 아내폭력이라고 부를 때는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명확한 성별의 특성이 보이고, 성차별의 특성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또 아내구타라는 용어에는 신체적, 물리적인 폭력 외에 언어폭력이나 감시 같은 폭력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가정 내 폭력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가정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 1주기를 맞은 강남역 살인 사건은 많은 여성들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폭력에 대해서 자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여성의전화에서도 이런 변화를 실감하시나요?

 

 

“물론 실감을 합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여성들의 외침이 큰 반향을 일으켰었죠. 이런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여성들이 더 이상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성폭력 문제가 피해자가 어떻게 행동해서, 가해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혹은 우연한 이유로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거죠. 이걸 알게 된 여성들은 가만있을 수가 없겠죠.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가정 폭력을 포함해 여성과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이 ‘몹쓸 짓’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서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폭력을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언론에서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하죠. 계속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이게 논쟁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너무 당연해서 논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여성주의에서 명명의 문제가 되게 중요하잖아요? 이것이 폭력의 문제고 성차별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서 바꿔 나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특성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글. 유디트 (ekitales@gmail.com)

 *이 글은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