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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그 후] 좋은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는가?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이 발생하고 구남친과 헤어졌다. 일면식도 없었던 여성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를 빼놓고는 우리의 이별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사건을 지나오며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JTBC

 

 

구남친은 긍정적인 성격에 화사한 웃음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잘못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반했었다. 친구였을 때 그는 살을 빼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의 무례함과 폭력성을 지적하자 그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 없이 내뱉던 말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며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대화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작년 오월을 함께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강남역 번화가 공중화장실에서 내 또래 여성이 아무 이유 없이 칼을 맞고 죽었다. 가해자는 ‘여자라서’ 죽였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나였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그런 흔한 사건이었다. 도저히 그 죽음과 나를 분리할 수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걸핏하면 눈물이 비집고 나왔고, 평온한 사회가 숨 막혔다.

 

 

 

“여자라서” 익숙한 말이었다. 여자라서 길거리, 학교, 일터, 집안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일상적으로 조롱과 비하를 겪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내 얼굴과 몸, 옷차림, 화장을 평가했다. 나의 몸가짐과 성격에 대해 왈가왈부했다. 학창시절에 여자애가 재수 없게 군다고 맞았고, 여자니까 취직이 더 어려웠고, 친구의 어머니는 여자라서 남편에게 맞았다.

 

 

 

그래도 내가 조금 더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말과 손이 몸에 닿는 순간들만 견디면 되는 줄 알았다. 참고 방관했던 혐오가 모여 하나의 죽음이 되는 걸 목격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 이내 나의 울음엔 분노가 담기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프로불편러’가 됐다. 여성 혐오적 발화를 묵인하지 않고 지적했다. 나와 친구들의 피해 경험을 나누는 일에 적극적이게 됐다. 내 삶을 이해하기 위해 여성주의 서적과 기사를 찾아 읽었다.

 

 

 

좋은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는가?

 

 

 

ⓒ 뉴스웨이

 

 

당시 어떤 여성 친구를 만나도 강남역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이젠 화장실은 2인 1조로 가자, 몰래카메라 범죄도 모자라서 살인도 걱정해야 하냐.’ 우리에게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피해 경험을 나누다가,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함께 분노했다. ‘이 사회에서 자라면서 성추행/성폭력 피해 경험이 없는 여성이 있겠냐’는 친구의 말이 귀에 맴돈다.

 

 

 

구남친은 내가 피해자에게 깊이 감정 이입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 사건이 여성 혐오에 기인했는지 아닌지 관심조차 없었다. 우울과 분노를 오가는 내게 왜 자꾸 슬픈 것만 보냐고, 아름답고 행복한 일들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내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감정은 여성이라는 성별과 떼놓을 수 없다. 페미니즘은 나의 삶을 가장 긴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이를 공유하지 않는 그와 나누게 되는 대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건 ‘조금 더 조심하라’는 공허한 말뿐이었다.

 

 

 

구남친은 또래 여성의 삶과 죽음에 공감할만한 자원이 없었다. 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성 폭력은 사소한 것 혹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여성들은 공포와 경계심에 기대어 살아간다. 남성들은 이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폭력은 우리 사회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를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여성폭력을 지워낸 ‘사회’란 결국 이를 묵인하고 동조한 ‘개인’들이다. 의문이 남는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좋은 사람이 있을까? 아니, 좋은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는가?

 

 

 

없다

 

 

 

강남역 사건은 관계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다. 그는 평범한 한국남성이었다.  나는 종종 그의 말들에 상처받았다. 그는 내 몸을 평가하는 데 익숙했다. 전날 체해서 토했다는 내 배를 만지며 조금 더 아프면 ‘설현’처럼 되겠다고 ‘칭찬’했다.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너는 모를 거라고 말했다. 

 

 

 

내가 가부장적 구조에 대해 말하면 그는 늘 개인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여성 친구가 애인의 부모님 생일까지 챙긴다며 기대를 내비쳤다. 나는 애인의 부모님을 챙기는 일이 대부분 여성의 몫이 되는 구조가 싫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개인적으로 부모님과 내가 친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는 여자친구를 때린다는 친구와 관계를 이어갔다. 여성폭력에 대해 말하자 그래도 자신에겐 잘해준다고 답했다.

 

 

생리가 늦어져 걱정하자 그는 ‘임신은 쉽게 되지 않는다’고 쉽게 내뱉었다. 난 그에게 ‘국산 야동’이 디지털 성범죄라고 말해줬지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어느 날 그는 친구 커플의 성관계 이야기를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너무 재밌지 않냐’고 숨도 쉬지 않고 웃던 그에게 ‘단체 채팅방에서 내 얘기도 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답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우리의 대화는 주변부를 맴돌다 끝이 났다. 그와 대화할수록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만 했다. 더 이상 내 마음에 남는 생채기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날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과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페미니즘이다

 

 

ⓒ 고함20

 

 

강남역 사건 즈음 헤어진 커플의 통계를 내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스갯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 나는 애인의 평온마저 원망스러웠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왜 그렇게 화가 나있냐고 묻는 애인이 싫었다. 그에게 되묻고 싶었다. 내가 땅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으면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도 함께 사라지냐고. 대체 왜 너는 이 분노에 함께하지 않냐고.

 

 

 

작년 오월, 우리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확인했다. ‘우린 모두 피해자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말의 틈새를 이해하기엔 그의 삶은 내 것과 너무도 달랐다. 그가 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모두의 삶은 다르다. 문제는 한 성별의 역사만 기록된다는 것이다. 구남친의 평온은 젠더권력에 기반을 뒀었다. 만약 그와 내가 여성의 역사, 누군가는 계속 여자라서 죽고 있다는 가려진 현실을 그려내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공유했다면, 거리는 좁혀졌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차별은 부당하지만 ‘페미니즘 같은 것’엔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관심도 없고 연루되고 싶지 않다던 페미니즘은 늘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여성폭력과 성차별은 실재한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이를 직시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 현실을 외면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일찍이 페미니즘과 친구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각자가 익숙했던 방관자, 동조자, 가해자의 역할을 내려놓을 때, 한 걸음씩 나아가 저항자가 될 때에서야 진통은 끝날 것이다.

 

 

 

글. 도이니 (soein1221@naver.com)

대표이미지. 뉴스웨이

 

[강남역, 그 후] 기획. 인디피그, 참새, 타라, 쌔미, 도이니  

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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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얼굴을 한 괴물

5 Comments
  1. 잘 읽고갑니다.

    2017년 5월 24일 12:26

    대한민국 페미니즘 안중근 전태일까지 미러링이란 명목으로 비난해도 그거 지적하는 사람 아무도 없음. 페미니즘은 집단병리현상입니다. 병이에요 병.

    • 다룬

      2017년 6월 2일 02:23

      와 여성혐오를 넘어 정병혐오까지 하고계시네요^^ 본인 잘못이나 되짚어보시지 그러세요^^ 미러링이 있기 전에도 꾸준히 고통받아온 여성은 무시하고 이제와서 에헴- 위인들을 모욕하다니..! 이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안돼..! 하시지말고요^^ 님이 방관자이자 동조자고 가해자세요 지금.

    • ㅇㅇ

      2017년 11월 7일 14:26

      응 아니야~

  2. 똥개

    2017년 6월 3일 05:59

    적어놓은 평소 언행으로 보면 좋고 똑똑한 사람이 아닌데요. 페미니즘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는 것과 별개로…

  3. […] http://www.goham20.com/55249 [강남역, 그 후] 좋은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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