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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의 끝 무렵에서 : 반납하기 싫은 일상의 선택지들

아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마음으로 이번 학기에 휴학을 했다. 지난 학기들 동안 빈틈없이 채운 스케줄에 비해 나는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기본기와 지식 없이 근근이 눈앞의 일들을 해결하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듯 불안했다. 누적되는 만성 피로에 처음 그 일들을 선택할 때의 열정을 잃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과 무기력만 가득해졌다. 결국 바쁘지 않되 너무 게으르지는 말자는 정도의 느슨함을 가지고 휴학계를 냈다.

 

 

 

나..휴학할 거야(훌쩍) ⓒ웹툰 <치즈인더트랩>

 

 

 

휴학으로 가지게 된 일상의 선택지

 

 

 

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언뜻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면이 많았다. 학업, 알바 이 두 가지만 하더라도 내 하루에 빈 공간은 많지 않다. 불행히도 알바는 대부분의 청년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 와중에 각자의 이유로 동아리나 대외활동까지 하게 되면, 그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휴식이나 짧은 여행 등의 소소하고 사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동아리 회의를 가기 위해 식사를 거르고, 알바가 끝난 밤 집에 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잠이 아닌 과제인 일상이 반복된다. 빼곡한 일상 속에 모든 일을 완성도 있게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치고 병들어도 ‘내가 선택한 일들이니까’ 라고 되뇌며 버티지만, 스케줄러에는 이미 무언가를 더 넣을 수도, 뺄 수도 없는 내일이 적혀 있다.

 

 

 

 

 

대부분의 대학생에게 알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웹툰 <치즈인더트랩>

 

 

 

휴학은 절대적인 시간의 여유를 보장했고, 특히 타인이나 단체가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대폭 늘어나게 했다. 지금 당장 끝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오늘 하루에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아르바이트와 스스로 정한 몇몇 고정적 규칙을 제외하면, 나는 마음대로 매일을 다르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햇볕과 바람이 적절히 공존하는 날 몇 시간이고 야외 테라스 카페에 앉아 날씨를 느끼는 데에 집중하기. 평일에 갑자기 서울을 떠나기.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시험 걱정 없이 벚꽃을 마음껏 보러 다니기. 갑자기 주어진 능동적 선택권은 내게 잃었던 열정과 기력을 주었다. 청춘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버티라는 류의 ‘긍정적 마인드’로 버텨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작 내 말대로 ~했으면 좋잖아”

 

 

 

 

춥지 않은 요즘, 밤공기를 마시고 싶어 밖에 나가 한 시간씩 운동을 했다. 겨우내 운동하지 않던 나를 못마땅해 한 엄마는 그런 내게 “이것 봐, (엄마 말대로) 운동하니까 살도 빠지고 개운하고 좋잖아.” 라고 핀잔을 주었다. 꽃이 피는 날씨에 평소보다 옅은 색의 립스틱을 바른 나를 보고 할머니는 기뻐하며 말했다. “거봐, 진작 할머니 말대로 여자다운 립스틱 바르니까 예쁘잖아.”

 

 

 

 

귀가 후 무엇을 할지, 어떤 색의 립스틱을 바를지 등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나마 내게 주어졌던 자그마한 선택권이었다. 그 사소한 선택의 권한마저 주변인들에 의해 간섭되곤 했다.  애초에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옳은 것만을 유일한 정답의 선택지로 정해 둔 후 내가 그 선지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면 본인이 뿌듯해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하지 않는 것은 자기 관리를 못 하는 게으른 성미로, 짙은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사회적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아웃사이더적 사고로 그들에게 인식되었다.

 

 

나의 선택에 관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 지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는 그러한 평가는 단순한 조언을 넘어선 간섭이 되었다. “쟤는 몇 번을 말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한숨).” 이 말에는 응당 수용해야 마땅한 것을 내가 굳이 거부하고 있음에 대한 못마땅함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반대로 우연히 그들의 바람과 나의 선택이 일치했을 때, 그들은 그것이 내가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라는 생각은 않고 그들이 설파한 ‘옳음’이 먹혔다는 뿌듯함에 기뻐하는 것이다.

 

 

 

휴학이 끝나면 선택지도 반납해야 한다

 

 

 

이번 학기의 종강이 한 달도 안 남았다고 한다. 나의 휴학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학과 함께 날마다 다르게 살 수 있는 일상의 선택지도 반납해야 한다. 휴학이라는 대안을 통해 맛본 선택의 자유는 다시 잃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기에, 그만큼 복학 후의 정해진 삶이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 걱정된다. 왜 나는, 우리는 고작 몇 시간 햇볕을 쬐고 싶을 때 마음껏 쬐는 정도의 자그마한 선택지를 위해 ‘휴학’까지 해야 할까. 고통을 유예하는 꼴인 휴학, 휴직만이 작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학업과 일터에 있으면서 이러한 선택지를 가지길 기대하는 것은 정말 사치인가. 덜 바쁠 수 있는, 휴식과 적절히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정말 불가능할까?

 

 

 

사회와 주변인이 지켜줄 수 있는 선택지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몇 년 전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보다 많이 진척되고 있다. 성남시의 청년에게 연 100만 원을 지급하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 배당 정책 등 실험적 수준의 기본소득 제도를 실행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기본소득과 청년수당이 보편적으로 와닿는 범위와 액수로 보편화 된다면, 많은 청년이 알바에 할애해야만 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 야근방지법, 휴식 있는 사회와 기업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던 것 역시 지금의 사회가 과도하게 업무 지향적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개개인의 여유와 행복을 중시하는 사회 제도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안 하면 안 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공존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개인의 선택에 다른 이가 손댈 권리가 없다는 인식이 만연해져야 개개인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 눈에 거슬려도, 부족해 보여도 그 사람의 선택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선택이 아니라면 해주고 싶은 말을 삼켜야 함이 미덕이 되어야 한다. 본인이 듣기를 원할 때 말해주는 것이 조언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말은 ‘고나리’이다. 발화자가 권력 관계의 우위에 있다면 이는 ‘강요’와 다르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될 ‘그름’은 있겠으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모두 각자의 상황과 감정,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고 있고, 선택지의 다양성은 많을수록 많은 이가 자유로워진다.

 

 

 

선택지 없는 사회와 선택지를 지우는 ‘고나리’에 힘들어하는 수많은 이들, 휴학과 갭이어 등으로 일시적 선택지에 숨통을 틔다가 다시 자유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착잡한 이들. 우리는 일시적이지 않은, 반납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와 자유를 원한다.

 

 

 

글. 땡치(see03142@naver.com)

땡치
땡치

세상에 종을 땡땡치는 글을 쓸래요

1 Comment
  1. Avatar
    윤하

    2017년 5월 30일 01:42

    공감가네요. 일상을 누리는 게 왜 일상적이지 못한 걸까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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