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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덜트’와 ‘된장녀’ 사이, 젠더화된 소비의 재현

국내 대형 유통업체인 <이마트>가 올해 전자기기 전문 마트 <일렉트로마트>를 론칭했다. <일렉트로마트>의 전략은 독특하다. 마트의 입구부터 계산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이 ‘남자들의 놀이터’라는 것이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다. 브랜드의 대표 캐릭터, 일렉트로맨은 슈퍼 히어로 의상을 입은 근육질의 남성이다. 다수의 일러스트에서 그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철없는 모습으로 <일렉트로마트>의 상품들을 가지고 ‘논다’. 매장 내부에는 갖가지 장난감 로봇과 드론이 전시되어 있고, 게임방과 작은 펍, 남성용 미용실도 자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일렉트로마트>가 여느 할인마트에나 있는 가전제품 코너 이상의 공간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남자들의 소비 놀이터, <일렉트로마트>

<일렉트로마트>는 마트이기보다, 마트 한구석에 차려진 놀이방 같다. 할인마트에서 판매하는 싼값의 생필품과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로봇 장난감 사이에는 괴리감이 느껴지고, 거추장스러운 쇼핑카트는 매장 내부로 입장할 수 없다는 안내문에서는 이 놀이방만큼은 일반 마트와 달리 더욱 쾌적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일렉트로마트 입구 앞에 놓인 쇼핑카트 보관함. 마트 내부에는 카트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안내가 쓰여 있다.

 

아내들이 쇼핑하는 동안 피신해있을 놀이방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편들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할인마트에서 이루어지는 쇼핑은 많은 경우 생활을 위한 노동에 가깝다. 생필품과 식료품을 가격을 비교하며 골라 담는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언제나 여성의 몫이었다. ‘생활을 위한 소비’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성별 분업화 되어 있는지, 앞서 말한 우스갯소리로부터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생활을 위해서만 소비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위해서도 돈을 지불하고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한다. <일렉트로마트> 또한 고객들이 스스로 즐겁기 위해 지갑을 열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진 공간이다. 일반 마트와 <일렉트로마트>의 차이점은 그 타깃의 젠더뿐 아니라, 타깃 고객들의 소비의 목적에도 있다. 같은 건물의 바로 아래층에서는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한 소비가 바쁘게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그 너절하고 지겨운 시장 바닥에서 도망친 남성들을 위한 놀이방이 거나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여가를 위한 소비 자체가 윤리적 단죄의 대상일 수는 없다. 로봇을 구매해서 가지고 놀든, 값비싼 레저 용품들을 수집하든, 누가 그 소비에 대해 쓸데없다거나 사치스럽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다만 이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소비만큼은 아주 오랫동안 윤리적 단죄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는 이야기이다.

 

여성의 ‘모든’ 소비에 찍히는 혐오의 낙인

 


<엘라스틴>, <펜틴>, <미장센> 샴푸를 사용하는 여성을 ‘된장녀’로 묘사하는 게시물

 

여성혐오와 ‘소비하는 자’에 대한 폄하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여성혐오의 대표적 언어로 지목되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은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일삼는 자’, ‘사회적, 경제적 무임 승차자라는 비난의 원색적 표현이다. 여성들이 이러한 멸칭으로 불려야 했던 이유들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더욱 뚜렷해진다. 아빠와 남자친구의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사고, 남편들이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애슐리>에 가 값비싼 식사를 즐기고, 남성들이 싸구려 자판기 커피로 디저트를 때우는 동안 <스타벅스>에서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고, 괜한 허영심에 구멍가게 대신 편의점을 이용하고, 뭔가 좀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엘라스틴> 샴푸를 즐겨 사용하고, 등등. 집에서 편히 놀고먹는 주제에 괜한 허영심에 빠져 필요 없는 사치나 일삼는다는 비난이 이 모든 멸칭 속에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성이 주요 소비자로 급부상한 문화 산업에서 여성 소비자의 문화적 위상을 떠올려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 관람을 즐기는 여성들을 문화와 스포츠의 가치도 모르면서 잘생긴 남성의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고 비아냥대는 ‘얼빠’, ‘빠순이’ 등의 조어는 명백히 여성의 문화적 소비를 폄하하는 언어이다.

반면에 남성들은 마치 소비와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들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이제껏 쇼핑을 즐기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풍부했으나 쇼핑을 즐기는 남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들의 ‘여가를 위한 소비’는 젠더화되어 재현된 적이 없었다. 취미, 레저, 뷰티 등을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성인 남성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얼리어답터’, ‘그루밍족’, ‘키덜트’와 같은 조어에는 성별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의 소비가 고도로 젠더화된 언어로 재현되어온 것과 뚜렷하게 대비를 이룬다.

여성이 구매하는 것이라면 생필품인 엘라스틴 샴푸와 편의점 상품마저도 사치와 허영으로 비난받았다. 소비의 목표가 생활인지 혹은 여가인지는 소비하는 자가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지 판단하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자의 젠더였다.

 

일렉트로<맨>에게는 쉽게 허락된 ‘소비를 즐길 권리’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문제이다. 우리가 누구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누구에게는 쉽게 이입하고 누구에게는 평가와 비난의 잣대부터 들이미는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누군가에겐 조건부로 주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가 가진 권력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에 어떤 모양과 크기의 권력이 들려있는지 인식하지 못할 때, 그 권력이 악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짝거리는 로봇과 멋진 드론은 맘껏 구매해도 좋다. 다만 당신의 소비만큼이나 다른 이의 소비에도 감히 윤리적 평가를 내리려 하지 말라. 당신의 장난감은 ‘철없음’으로, 다른 이의 명품 가방은 ‘허영심’으로 함부로 판결을 내리는 순간, 권력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확대된다. 오천 원짜리 커피를 마실 때에도 눈치를 보며 망설여야 했던 여성들에게 이러한 일상이 명백한 윤리의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글. 헤스터 (hester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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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zyun

    2017년 9월 13일 07:09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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