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페이지 <철페 Fe;minism : 고려대학교 철학과/반 여성주의 소모임>

 

11월 30일, 고려대학교 철학과 페미니즘 소모임 <철페>에서 ‘고려대학교 강간문화 철페하기’라는 제목으로 오픈 세미나를 열었다. 작은 학과의 소모임에서 주최하는 소규모 행사였다. 그러나, 한 고려대 학생이 학내 커뮤니티 ‘고파스’에 웹자보와 함께 ‘강간은 고려대의 문화인가요?’라는 조롱조의 글을 썼고,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고파스 유저들은 ‘고려대학교에 강간 문화가 어디 있냐’, ‘고려대생을 전부 강간범으로 몬다’,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고려대학교의 명예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동시에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강간문화’라는 워딩이 들어간 자보는 DC 인사이드, 도탁스, 루리웹, 개드립 등 다양한 남초사이트로 퍼져갔고, 급기야 유명 혐오 페이지인 ‘유머저장소’에서도 이 글을 공유했다. 구성원이 20명 남짓한 작은 모임이던 철페는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모르는 남성이 소모임 일원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거나 개인 SNS 계정에 찾아와 비난 댓글을 다는 등 사이버불링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 고파스 갈무리

 

 

영화 보는 수요일만 ‘문화’인가요?

 

레베카 솔닛에 따르면 ‘강간문화(rape culture)란 강간이 만연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미디어나 대중문화에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하는 여성학 학술 용어이다(출처 : 페미위키). 여기에는 강간을 미화하고 판타지로 만드는 행위, 가해를 묵인하고 강간의 원인을 피해자로부터 찾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강간문화는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여전히 성폭행 피해자들은 주변의 시선과 2차 가해가 두려워 공론화를 망설이게 된다. 한 공동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고개를 떳떳이 들고 남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강간이 성적 판타지의 일종처럼 독해되고, 강간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성적 이목을 끄는 매체가 많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레진코믹스 성인웹툰 ‘속죄클럽’은 주인공 여성을 단죄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적 성행위와 폭력을 암시하는 광고를 하였다. ‘자박꼼(자지 박으면 꼼짝 못한다)’이라는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남초 익명 사이트를 돌아다닌다. 철페의 포스터가 퍼져나감에 따라 남초 사이트에서는 ‘고려대학교에 갔어야 했다’, ‘고려대학교에 가면 강간할 수 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부 강간문화의 사례이다.

 

논란은 강간문화를 ‘강간을 즐겨하는 문화’라고 해석한 데에서 기인하였다. ‘문화’라는 단어를 교양이나 좋은 취미 정도의 의미로 오독한 결과이다. 예상치 못한 논란이 생기자 철페 측은 강간문화의 학술적 의미와 세미나를 기획하게 된 의도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강간문화라는 자극적인 워딩으로 관심을 끌려 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사과해라’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이미 존재하는 학술용어를 사용하여, 이미 존재하는 현상들을 분석하고 비판했을 뿐인 철페가 사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사과해야할 사람을 굳이 찾자면, 철페가 아니라 강간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이들이다. 강간이라는 단어를 범죄가 아닌 자극적 소재로 받아들이는 경향마저도 강간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진정으로 부끄러워야 할 것은 ‘고려대학교’와 ‘강간문화’가 같이 쓰이는 일이 아니라, 학내에서 끊임없이 성폭력 사건이 터지는 일이다.

 

 

저희, 명예 못 잃어요

 

본래 철페의 세미나는 고려대학교 캠퍼스 내의 문과대학 강의실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글이 논란이 됨에 따라 문과대학 측에서는 교우회와 고파스의 항의를 근거로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대담 후 강의실 사용을 허가받기는 했으나, 철페는 캠퍼스 인근 인문사회과학 북카페 ‘지식을 담다’에서 세미나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문과대학 측은 사건이 터진 직후, 대관 절차에 지도교수와 학과장 직인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바꿨다. 변경된 대관신청서에는 학생과 대학의 품위를 손상하는 경우에는 대관을 취소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었다. 학교의 위상은 이미 존재하는 문화를 가시화함으로써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들, 이를테면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난 유난히 많은 강간, 성추행, 언어성폭력, 불법촬영의 사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고려대학교의 마초적인 분위기는 과반, 학생회, 동아리, 강의 도중까지 모든 곳에 걸쳐 성폭력과 혐오 발언이 허용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에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교는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비판하기 위한 세미나를 규제하려 들었다.

 

신입생 시절부터 마초적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를 내면화하게 되는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의 페미니스트들은 학내의 사회적, 제도적 위협에 시달려왔다. 이번 철페 사태처럼 학교 안팎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례가 드물 뿐, 학내 여성주의 모임에 대한 탄압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철페: 이기는 페미니스트

 

결과를 말하자면, 세미나는 성황리에 끝났다. 작게 기획했던 행사는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학술제’가 되었다. 학과, 학교의 안팎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세미나에서는 강간문화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개론적 내용부터, 공동체 내부에서 실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나 고려대학교의 특수한 남성성까지 다양한 내용이 다루어졌다.

 

세미나 장소에 가 보았다. 온라인상에서 철페를 공격하고, 세미나를 못 하게 만들거라며 분노하던 이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세미나에 모인 이들은 ‘정말 절실하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예상 참석자들로 생각했던 학과 사람들은 물론이고, 타교생이나 대학문화 바깥에 있는 페미니스트들까지도 자리에 모였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세미나 도중 “자신은 대학 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대학사회 바깥에서도 연대를 보낸다”고 전했다. 철페의 세미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연대의 성공이다. 이 세미나가 성공한다고 강간문화가 사라지지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모두 인권 감수성을 가지게 되지도 않는다. 허나,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는 승리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스터에서 ‘강간문화’ 넉 자를 삭제하고 공식 사과문을 올리라고 항의했다. 일개 학과 소모임인 철페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입을 막는 것이 당장의 논란을 덮는 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철페의 포스터에서 강간문화 넉 자를 지운다고 강간문화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음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항의들이 지금까지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왔음을 알아야 한다. 오픈세미나 <고려대학교 강간문화 철페하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강간문화를 공론화했다. 강간문화를 생산하는 이들이 자기 입으로 직접 ‘강간문화’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세미나 담당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강간문화’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일조하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밝혔다.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철페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 뽐므 (16193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