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우리 시대의 화두인 젠트리피케이션의 유일한 원칙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어원은 젠틀맨의 그것과 같다. ‘신사계급’을 칭하는 어근(gentry)은 어미(-fication)와 합쳐져 ‘신사화’라는 의미로 완성된다. 즉, 젠트리피케이션은 곧 ‘멀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저분한 것들은 지워져야 한다.

 

건물을 허무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떤 노동, 어떤 계층은 그 자체로 지저분하게 여겨진다. 값싼 임대료를 찾아 홍대, 서촌, 상수를 찾았던 영세 자영업자와 예술가들은 수년 전부터 진행된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도심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전치민들이 쫓겨난 자리엔 깔끔하고 멀끔한 것들,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브랜드 식당이 들어선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자 동명으로 영화화된 <렌트>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겪는 20세기 말의 예술가들을 그렸다. 주인공들의 거처인 뉴욕의 슬럼가 ‘이스트 빌리지’는 낡은 벽돌 건물들이 빽빽하며, 그 위로는 정돈되지 않은 그라피티가 씌워져 있다. 영화는 한때 예술가들의 동료였던 자본가의 회유로부터 시작한다. 자본가는 높은 빌딩을 지으면 스튜디오를 내어주겠다고 설득하지만, 보헤미안들은 강경하다. ‘돈을 낼 생각도 없고, 공간을 포기할 생각 또한 없다.(“we’ll not gonna pay”)

 

ⓒ영화 <렌트rent>

 

혹자들이 ‘내 집 마련’을 존재론적 정착이라 말할 때, 이스트빌리지의 보헤미안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겠다고(“I’ll cover you”) 되받아친다. 자본가가 일 년 치의 임대료로 시간을 셈할 때, 이들은 서로에 대한 천 번의 키스로 임대료(“with one-thousand-kiss”)를 대신하고, 사랑의 시간(“Season of love”)으로 한 해를 셈한다. ‘중요한 것은 쾌적하고 멀끔한 집이 아니라 너저분한 공간에 모여 살며 맺는 관계다.’ 20세기적인 낭만으로 <렌트>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다.

 

소공녀가 그리는 다른 젠트리피케이션

한국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이야기 또한 높아진 임대료(Rent)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집주인과 싸우는 일도 능사는 아니다. 더 이상 집주인은 빌딩을 올리고 싶은 자본가가 아니다. 월세 5만 원 올리면서 ‘나도 내 주인님이 10만 원 올려서’하고 미안한 듯 덧붙이는 집주인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의 집 주인’을 모시는 임차인이기도 하다. 그의 거친 얼굴에는 20세기 <렌트> 속 자본가와 같은 기름기가 없다. 그는 너무도 안쓰러워 보인다.

 

공간 또한 다르다. 영화 속 ‘밀려 나옴’은 이스트빌리지라는 마을이나 거리가 아닌 단칸방이다. 이웃이라는 단어가 힘을 잃어버린 시대, ‘미소’ 곁에는 곰팡이와 바퀴벌레뿐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복잡하다. 투쟁이 난망하니, 남은 선택지는 적응이다. 나갈 돈이 늘었으니 술, 담배, 집 중 어느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미소’는 집 없이 살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짐을 끌며 친구들 집을 떠돈다.

 

ⓒ영화<소공녀>

 

‘미소’는 집을 포기했다. 그러니 젠트리피케이션으로부터 해방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생산적이지 않은 것들에 쏟는 시간과 금전을 줄이라.’ 한 세기와 바다를 건너 다른 젠트리피케이션이 미소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소공녀>가 보여주는 젠트리피케이션은 공간이 아닌 삶과 일상을 향한다.

 

예컨대 미소가 찾아간 과거의 밴드 동료들은 너무도 변했다. 기타리스트는 아기를 안고 “자식만이 구원”이라고 읊조리고, 키보디스트의 손은 도마와 싱크대 위만을 오간다. 미소의 친구들은 ‘결혼’, ‘가족’, ‘직업’ 속에서 정해진 행동 양식에 맞춰 자신의 삶 겉면을 깔끔하게 가다듬기 위해 노력한다. 공간의 젠트리피케이션이 거리를 ‘깨끗하게’ 치워버렸다면, 일상의 젠트리피케이션 속에서는 불결한 습관(술과 담배)은 지워져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에 적응하려는 친구들에게 집도 절도 없지만, 여전히 담배와 위스키를 끊지 못하는 미소야말로 그들의 ‘보헤미안적 과거’다. 이제 그 과거를 보면서 보헤미안들은 어른의 표정으로 웃어 보인다. 세상모르는 아이를 보는 부모의 슬픈 표정을 하고.

 

사랑을 지키는 일

 

“나 술 담배 사랑하잖아.”

 

집도 없으면서 술은 왜 마시고, 담배는 왜 태우냐는 물음에 미소는 답한다. 사랑하니까. 이때의 사랑은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 놀음은 아닐 테다. 미소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가늠하기도 전에 그녀의 친구 ‘정미’가 답한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고. 사랑은 이제 염치의 문제를 거스를 수 없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집도 절도 없는 ‘미소’가 술과 담배를 사랑하는 게 염치없는 일이라면,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랑이란 무얼까. 그녀의 친구 ‘정미’가 보여주듯 자식과 남편에게 주는 사랑이 그런 것일까? 사랑은 그것에 관해 무언가 말해지기도 전에 염치의 문제 속으로 편입된다. 미소의 입을 막는 정미의 빠른 반응처럼. 그런데 보헤미안이었던 과거를 숨기고, 식사 때마다 남편의 스테이크를 썰어주며, 그 앞에서 교양 있게 웃던 정미는 진정 사랑을 통해 행복했을까.

 

‘정미’의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되고, 자식으로 결과를 낳는다. 결혼과 자식은 그에게 안정감을 선물한다. 반대편에서 ‘미소’가 가난한 청년 ‘한솔’과 유지하고 있는 관계는 매우 불안정하고, 물질으로도 궁핍하다. 가난하기에 맛집, 영화로 가득한 데이트를 할 수 없다. 결혼이라는 ‘연애의 종착지’로도 매끄럽게 이행할 수 없다. 이 대립항 속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아이러니는 사랑이 주는 존재론적 안정, 그 속에서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랑의 본령을 후자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헌혈로 데이트 영화표 값을 벌고, 서로가 지닌 꿈을 응원해주며, 그의 지저분한 겉면 속 진정한 무언가를 찾는 것에서.

 

ⓒ 영화<소공녀>

 

<렌트Rent>는 연대와 투쟁으로 보헤미안의 낭만을 그렸다. 소공녀는 다른 방식으로 취향의 젠트리피케이션과 싸우는 담대한 여성을 보여준다. 집 없이는 살아도 술과 담배, 그리고 사랑 만큼은 젠트리피케이션 당할 수 없다고 미소는 말한다. 전자의 사랑은 집단 속에서 울려 퍼지는 ‘투쟁의 구호’였다. <렌트>의 사랑이 자본(임대료)에 대항해 싸울 에너지와 열정의 근원이라면, <소공녀> 속의 사랑은 주인공의 이름이 의미하듯 은은하고 소박한 웃음이다.

 

가사도우미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미소는 지저분한 것을 치운다. 지저분한 도시를 멀끔한 대리석으로 바꾸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외관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 미소는 건물 속을 향한다. 그녀의 청소기와 물수건이 훑고 간 곳에서 일상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치워냈던 것, 그러나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그것이 다시 드러난다. <소공녀>의 미소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사라져”라고 읊조린다. 하지만 영화가 미소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뒤집혀진 문장, ‘사라지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다.

 

 

글. 압생트(9fifty@naver.com)

특성이미지ⓒ 영화 <소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