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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학살이다” – 구제역 그 후, ‘치킨’과 ‘삼겹살’을 외치는 당신에게

“당신은 이미 공범이 되었다.” 

 

지난 3월, 김포 돼지 농가에서 올해 첫 구제역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날 구제역 발생 농장의 돼지 917마리에 대한 살처분을 결정했다. 2014년 7월부터 이번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총 4차례. 그동안 매장된 돼지의 수는 이제 20만 8천 마리를 훌쩍 넘는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한다. 정말 살처분만이 답일까.

 

김포 구제역 돼지 살처분 현장 ⓒ 기호일보

 

구제역 예방을 위해, 정부는 꾸준히 백신 접종을 해왔다. 그러나 구제역은 단지 백신을 접종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 가축전염병의 근본 원인은 ‘공장식 축산’에 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돼지고기의 99% 이상이 대표적인 공장식 축산 방식인 ‘스톨’에서 사육되어 생산되고 있다. 폭 60cm, 길이 200cm의 쇠로 만들어진 감금 틀 ‘스톨.’ 어른 돼지의 몸집은 보통 가로 65~70cm, 세로 205~220cm이다. 자신의 몸집보다도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웅크린 채 겨우 앉았다 일어서기만 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이에 대해서, 카라(KARA) 등의 동물권 단체는 지속적인 시정 호소를 해왔다. “공장식 축산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같은 대규모 전염성 질병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작년 6월, OECD가 공개한 ‘한국가축 질병 관리상 농업인 인센티브’ 보고서에는 “급격한 집약화가 고(高)병원성 가축 질병 재발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내용 또한 포함되어 있다. AI(조류 인플루엔자), 구제역 등 가축 질병의 근본적 예방을 위해선 결국, 현재와 같은 집약적 사육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공장식 축산을 타개하지 못하는 데에, 현실적인 장벽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토지는 부족하고 비싸다. 돼지, 닭, 소를 향한 사람들의 수요는 매년 구제역과 AI가 발생해도 넘친다. 식육 산업이 현재의 이윤 폭을 유지하려면, 과밀한 공장식 축산은 불가피하다. 동물에 대한 복지 따위는 동물의 몸(고기)이 가져다줄 이윤에 의해 무시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구제역으로 돼지 917마리 살처분’이란 뉴스를 본 우리의 주된 반응은 무엇일까.

 

결국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한동안 삼겹살값 오르겠네! 치킨 먹자”다. 매장당하는 돼지의 사진이나 영상은 불편하니, 빠르게 넘기거나 채널을 돌려버리고 만다. AI가 발생해도 다를 건 없다. ‘삼겹살’과 ‘치킨’의 위치만 바뀔 뿐이다. 우리의 무심한 반응 뒤엔 ‘육식의 비(非)가시화’가 있다. ‘육식의 비가시화’란 고기와 고기를 제공한 동물을 연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을까. 왜 족발을 먹으며, 귀여운 아기 돼지를 떠올리지 못할까.

 

스톨은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바이러스가 확산하는 데에 최적의 환경이다. ⓒ 카라(KARA)  

 

‘정말로’ 모르고 있나요?

 

사실 ‘먹을 수 있는’ 종에 관한 우리의 인식 과정에는 사라진 연결고리가 있다. 영어로 소는 ‘cow’라고 부르지만, 먹을 때는 ‘beef’가 된다. 돼지 역시 ‘pig’라고 배웠지만, 돼지 토막은 ‘pork’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돼지 토막 구워 먹을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삼겹살 먹을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도살”이란 표현 대신 ‘가공’이라고 한다. 가축이 고기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말들이 너무 정확하고, 구체적이면, 소비자들이 불편해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업계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현대의 소비자는 육류와 가축을 동일시하는 연상을 싫어한다.” 영국의 축산업계지 ‘브리티시 미트’의 주장. 여기서 나는 질문한다. 우리도 ‘어느 정도는’ 진실을 알지 않은가.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만 그 이상으로 알고 싶지 않을 뿐이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축산업계가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상황에서 정보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쉬워지도록 우리 스스로가 돕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들이 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그들이 “동물들은 평화로운 농장에서 뛰어놀지요”라 하면,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구제역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번에 발생한 구제역이 사라져도 말이다. 동물들 역시 ‘당연하게’ 구덩이 속으로 다시 내몰릴 것이다. 돼지를 살리기 위해 돼지를, 닭을 살리기 위해 닭을 죽이는 일.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매끼 식사에 수많은 살점이 오르는 한, 공장식 사육과 구제역, 돼지 생매장은 사라질 수 없다. 우리의 식탁을 다시 한번 돌아볼 때이다. 저서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문장이 생각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은 방금 식사를 마쳤다. 도살장이 아무리 먼 거리에 용의주도하게 감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제 공범이 되었다.”

 

 

글. 제인(dbswls5087@naver.com)

특성이미지ⓒ 기호일보

 

* 참고문헌
– 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제인
제인

뿌리에게

3 Comments
  1. Avatar
    학살자

    2018년 6월 28일 02:24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학살자다.
    개는 사랑하면서 왜 돼지와 닭은 먹냐.

    저는 글쓴이분의 이런 표현들이 심히 거슬립니다.
    묻고싶습니다. 저렇게 표현하시는 글쓴이분께서는 얼마나 잘나셨습니까.
    글쓴이분께서는 온전히 채식을 하고 계십니까.
    어떤 동물성 영양소도 일절 섭취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껏 화장품이나 썬크림, 연고 등 약품을 일절 써본 적이 없으십니까.
    지금까지 동물 실험으로 독성 조절해서 만들어진 수많은 백신들. 단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으십니까.
    지금 이 글을 인터넷에 쓰셨으니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땅에 매장된 광케이블 인터넷, 그리고 전자기기, 그것들을 가동시키기 위해 환경을 오염시키고 동물, 곤충, 식물을 해치는 방법으로 생산된 전기로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모기 등을 비롯해 인간에게 해충이라는 불리우는 곤충은 어떻습니까. 모기를 잡기 위해 어떠한 살상행위도 없이 온전히 몸을 내어주십니까. 바퀴벌레가 집안에 출몰했을 때 같은 생명이라 칭하며 그 바퀴벌레가 퍼뜨릴 병균 등에 대해서도 방치하십니까.
    이렇게 나열한 것들에 자유로우시다면 살상이라는 행위에 자유로우신 분이니 육식을 하는 인간을 두고 학살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겠지요. 설사 글쓴이분이 자아정체성이 생긴 이래 제가 위에 나열한 것들대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전에 글쓴이분 부모님께서는 저기에 충실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 손윗세대도 마찬가지지요. 고기를 비롯한 생물들을 죽여 얻은 음식으로 글쓴이분께 영양분을 공급해줬을 것이고, 임신 중에 말라리아 등 바이러스라도 옮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라도 모기를 때려잡았을 것이고, 태어나서 글쓴이분이 자라 스스로 채식을 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죽였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글쓴이분을 학살자라 칭해도 무방해보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겁니다. 살아있는 생물은 자기 외 어떤 생물을 희생시켜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희생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으신겁니까? 그렇다면 글쓴이분도 크게 잘못하고 계시는겁니다. 그런데도 글쓴이분은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을 두고 학살자라 표현합니다. 마치 본인은 아닌 것처럼요. 공범이라고 표현했으니 같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 글을 써 올리는 부분에서 이미 그런 글조차 쓰지 않고, 비건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존재가 된 셈이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덜 살상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들 학살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십보 백보에 불과합니다. 글쓴이분이 먹어서 살상을 줄이는 것의 비중보다 일상적으로 살상행위로 얻어낸 것인지조차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큽니다. 글쓴이분께서 말하는 생명존중이란 ‘나는 그나마 낫지’라는 자위에 불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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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자

      2018년 6월 28일 02:37

      그리고 연구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채식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달리 그렇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양소의 문제든, 채식에 들어가는 비용의 문제든 여지는 많지요. 글쓴이분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학살자로 규정했고, 심지어 부분채식을 하는 사람들조차 학살자로 규정했어요. 글쓴이분 입장에서 학살자가 아닌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낙과주의자라고 다를 것 같습니까? 자연속에서 태어나 식물만 섭취하며 자라는 사람들조차 뜻하지 않게 살상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데요.

      제가 이렇게 길게 댓글을 단 것은 글쓴이분의 글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만(傲慢).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동물 뿐만 아니라 식물도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거. 물론 글쓴이분께서는 고기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식물의 양이 더 많으니 역시 ‘덜 살상하기 위해’ 식물을 먹는 것이 낫다고 하시겠지요.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학살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식물학살자에요. 자연상에서 놔두면 살아있을 식물을 뜯어내고,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죽이고 하는 학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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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수

      2018년 7월 27일 18:38

      채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이 글이 오만의 소치는 아닌 것 같네요
      어떠한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오롯이 선한 사람만이 되어야 한다면 세상에 도덕이 어디 있을까요?
      댓쓴이께서는 오만을 한번도 저지른 적이 없어 글쓴이를 오만하다고 하고 계시나요?

      글의 주 논지는, 학살과 다름없는 현재의 도축과정과 그 과정을 애써 비가시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댓쓴이께서는 현재처럼 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식물을 먹는 것도 문제가 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침묵시킬 순 없습니다. 마치 살인을 하는 사람이 동물의 도축을 가지고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요.

      누가 옳고, 논리적으로 타당한가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가? 라고 생각합니다.
      댓쓴이분께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합니까? 공장식 사육에서 비롯된 병으로 학살이 반복적으로 자행되는 사회. 아니면 그들의 복지를 보장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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