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기

이상한 정상가족, 귀여우면 다인가요? – 영화「코코」 리뷰

<코코>를 보고 나오던 길에 내 얼굴은 분명 눈물범벅이었다. 객석의 반 정도를 채우고 있던 다른 어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멋쩍어하며 서둘러 극장을 나서는 많은 이들을 지나쳤으니 말이다. 그렇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관을 나섰지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함과 함께 왠지 이렇게 생각했다. ‘조카와 이 영화는 보면 안 될 것 같다….’

 

ⓒ영화 코코

 

“핏줄”이면 폭력적이어도 괜찮은가

<코코>속 주인공 미구엘은 음악을 사랑하고 뮤지션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을 금기시한다. 미구엘은 꿈과 가족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구도 속에 놓이며 자연스레 가족과 대립한다.

 

이 때 미구엘이 겪어내는 갈등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가업인 신발 만드는 일에 소질이 없으면 어찌하냐는 미구엘의 질문에 아버지는 “걱정 말고 가족만 따르면 돼. 넌 이 가문의 핏줄이야.”라고 대답할 뿐이다. 게다가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라고 운을 떼는 할머니는 결국 미구엘의 기타를 산산이 부숴버리며 “이제 기타도 없으니 음악은 포기해. 대신 가족이랑 밥을 먹으면 화가 풀릴거야.”라고 말한다. 개인의 목소리가 가족이란 미명하에 철저히 소거되는 순간이다.

 

갈등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사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미구엘의 고조부인 헥터가 있다. 과거 헥터는 미구엘과 비슷한 갈등을 겪다 자신의 꿈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러나 저승에서 미구엘과 헥터가 만나게 되면서, 헥터 또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선택한 인물도 알고 보니 그것을 대단히 후회했다는 서사가 이어지면서 미구엘과 우리는 자연스레 가족의 가치에 비중을 두게 된다.

 

‘급’ 낮은 유사가족?

가정을 떠난 헥터가 저승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가족의 가치는 한 번 더 힘을 얻는다. 그는 저승세계 안에서도 음침한 변두리에 위치한다. 그 변두리에는 헥터와 같이 이승에서 ‘정상가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 모여살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고 삼촌, 사촌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람들의 공동체를 혈연 관계로 맺어진 가족보다 한참 낮은 ‘급’이라고 믿는 듯하다. 이승에서 이들을 기리는 혈연관계의 누군가가 없으면 저승에서마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설정과 너무도 누추해 보이는 이들의 행색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마치 가족을 떠나게 되면 이러한 방식의 ‘단죄’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미구엘은 필연적으로 가족주의를 내면화한다. 그는 그의 고조모 이멜다에게 헥터를 용서할 것을 간청하며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헥터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이멜다에게 오히려 “용서는 못하더라도 잊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도 한다. 영화는 소년이 겪은 폭력들을 사과하기는 커녕 정상가족의 숭고함으로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스스로 “가족이 우선이잖아요”라는 말을 되뇌며 음악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소년의 미소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영화 코코

 

영화의 제목은 <미구엘>이 아니다

영화가 미구엘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갈등을 해소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해피엔딩이었으리라.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끝내 주인공 ‘미구엘’이 아닌 ‘코코’다. 영화 말미에 미구엘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가족이 ‘승인’을 내린 후 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승인의 이유 또한 음악이 헥터를 정상가족의 품으로 돌려놓은 매개였기 때문이다. 미구엘은 꿈도 이루고 가족과도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족 이데올로기의 울타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이를 너무도 아름답고 귀엽게, 그리고 그럴듯한 서사를 얹어 포장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가족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 이들이 주는 따스함에 감동받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위험하다. 감동에 치여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주는 달콤한 안온함만을 되새기기 쉽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찝찝했던 이유는 나 또한 이미 그것들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아이들만은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디즈니식 서사’를 보고, 울고, 염려해야 하나. 이제는 더이상 개인의 목소리를 앗아가지 않기를,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그려내기를 바라면서 다음에 나올 디즈니 영화를 불안하게 기다릴 뿐이다.

 

 

글. 낫또(angelzz1030@gmail.com)

특성이미지 ⓒ영화 코코

낫또

잘 사는 법을 궁리중입니다.

3 Comments
  1. 홍승희

    2018년 7월 28일 11:42

    이 글의 필자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영화 (코코)가 ‘가족’이란 이름 하에 철저하게 개인성이 짓밟히는 과정을 영화화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해석 면에 있어서 보이는 몇 가지 ‘오류’가 있어 글을 남긴다.
    나는 멕시코에 오래 있지 않았고, 스페인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곳에 있던 몇달은 그 어느때와 달리 행복했던 기간이기에,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Family Value’를 중요시하는지 알고 있다. 친구의 집에 초대돼 가족들과 밥 한 끼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 나라에서 가족은 우리나라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하며, 그들은 오랜시간 강력한 종교적 믿음을 기반 삼아 가업, 가풍의 문화를 고착화시켰다. 학문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Valor Familiar’(Family Value)일 정도니 어쩌면 그 문화에서 나타나는 가족주의는 공동체주의나 전체주의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그들 삶에 상당히 밀착되어있으며 영향을 미치는 기저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는 ‘네가 하고싶은 일을 하더라도 가족의 소중함은 여전하며 변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인의 목소리를 ‘앗아간 것’이 아니라 ‘심어준 것’이다. 필자가 지적한 ‘헥터’가 가족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는, 그가 그러고 싶지 않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보고싶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길을 포기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택한 길이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단 걸 깨달았으며,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들 곁에서 연주를 하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겔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게 된 것도 가족의 ‘승인’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 그들의 전통적인 가족관을 깨도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불안감’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코코의 배경이 멕시코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멕시코의 ‘특수성’을 비춰내 그 민족이 좋아하는 ‘음악’이란 소스를 곁들여 함께 섞어 제작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 미치겠는 일을 할 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한 영화이다. 또 다른 배경과 특수성을 담은 다음 디즈니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지, 기다려진다.

    • 김장우

      2018년 9월 4일 08:35

      홍승희씨에게
      언뜻 그렇게 보실수도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해도 죄책감을 가질이유없다”
      라는 메세지가 잇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멜다라는 캐릭터가 “조건없이” 라는 식으로 마지못해허락하는 수준으로 말한거 빼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찾아봐도 그런 메세지는 없더군요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일이 언제든 니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빼액! 하는 강요의 느낌이 너무 강했죠. 이게 삐딱한 시선인가요? 영화를 아무리 곱씹어봐도 음악적 열정이나 개인의 열정 서사에 관한 그 어떤 조그마한 옹호조차 찾아볼수 없었던 일종의 폭력적인 타자화가 상당히 많이 작용한 영화같네요
      헥터가 비록 가족과의 단절을 어쩔수 없이 겪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와 서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그렇게 산 삶 자체를 완전히 잘못된것으로 몰아가기만 한채 결국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 가 없으면 개인의 성취나 노력과 열정을 무의미한것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걸로도 읽힐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이건 과대해석일수도 있으나 제작진의 연출상 특정 제가보기엔 어쩌면 장르들에 대해 어떤종류의 음악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가족애를 담을수있는 인간적인 진정함인데 비해 다른 어떤것은 다같이 즐기지만 화려하기만 할뿐 감동없는 배제되어야할 쓰레기 인것처럼 위계를 정해버린것마냥 보여지기도 한 폭력적인 시선의 영화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뿐 나온 장르가 맡은 역할까지 불편해할 필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외에도 양분해서 선악으로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한 문제들이 보이네요

      가족애는 가끔 권장할수도 있지만 어쩌면 코코의 멕시코식 가족주의는 철저한 혈연주의나 전통주의에 입각한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그게 멕시코의 특수한 전통 문화건 말건 우리는 21세기 인간에의한 인간을위한 세상에 살고있고 전통적 가족이든 국가든 결국은 인간의 소망보다 중요하지 못합니다. 그게 가족과의 사랑이든 자신의 노력과 열정의 발산과 성취든 간에 그 둘중 어느하나가 무조건 다른쪽을 희생시키고말거라는 발상을 이영화는 부르짖고잇더군요. 물론 가족만큼은 버릴수 없다는 말투로 이미 처음부터 저울을 치우치게 만들어놓은채 말이죠.
      이런식의 노골적이면서도 숨겨진 미국영화들의 과도한 가족주의는 미국의 가족해체를 염려하는 보수적 시각에 의해 많이 나오고 잇다는것을 많은 평론가와 대중들이 이미 지적하고 잇습니다. 게다가 저와 필자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사람들을 꽤 봤는데 이런 의견들이 꽤 나올정도면 영화가 전하려는 메세지에 결함부분이 명백히 존재하는건 인정하셔야 할거같습니다. 사실 인간사이의 유대에 관한 소중함을 이야기하려면 이런 폭압적인 가족주의보다 더 유용한 방법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픽사야말로 창업자부터가 개인의 열정과 성취를 결코 천시하지 않는 진취적 회사일거라 믿어왔지만 이런 영화가 나와 상당히 불쾌하네요

      영화가 너무 성급하게
      “이런 가족애적 삶은 옳고
      그렇지못한 개인의 삶은 옳지않아” 라고 박박 우겨대는 느낌을 영화보는 내내 받아서 불쾌하기만 햇습니다
      영화 중반부에도 헥터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소망이 중간중간 나옵니다. 가족애적 연출에 밀려 찌그러졌지만 분명 그에게도 어쩌면 가족이상으로 소중할수도 있는 자신의 꿈에 관한 소망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영화가 무언가를 과하게 타자화하고 배제하여 구분지으려는 듯한 연출을 보여줬던건 반박하실수 없을거에요.

  2. 김장우

    2018년 9월 4일 08:04

    홍승희씨에게
    그와중에도 일종의 폭력적인 타자화가 상당히 많이 작용한 영화같네요
    헥터가 비록 가족과의 단절을 어쩔수 없이 겪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와 서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그렇게 산 삶 자체를 완전히 잘못된것으로 몰아가기만 한채 결국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 가 없으면 개인의 성취나 노력과 열정을 무의미한것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걸로도 읽힐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이건 과대해석일수도 있으나 제작진의 연출상 특정 제가보기엔 어쩌면 장르들에 대해 어떤종류의 음악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가족애를 담을수있는 인간적인 진정함인데 비해 다른 어떤것은 다같이 즐기지만 화려하기만 할뿐 감동없는 배제되어야할 쓰레기 인것처럼 위계를 정해버린것마냥 보여지기도 한 폭력적인 시선의 영화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뿐 나온 장르가 맡은 역할까지 불편해할 필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외에도 양분해서 선악으로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한 문제들이 보이네요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