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요, 왔어요, 청년 연구소가 돌아왔어요!’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다. 아니, 이렇게 묻는 것이 좋겠다. ‘88만원 세대론’을 혹시 기억하는가? 우석훈과 박권일은 저작<88만원 세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가시화했다. 그 뒤로 3포, 5포, n포세대론이 바톤을 넘겨받았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청년 세대는 경제적 약자이고, 청년 세대는 경제적으로 가난하다.

여기에 비판이 이어졌다. 청년세대를 경제적 약자로 바라보는 와중에서 청년 세대 내부의 이질성이 가려진다는 지적들이었다. 경제적 약자로서의 청년 세대론은 세대 내의 동일성을 과장하여 청년 내부의 젠더에 따른 격차, 지역에 따른 격차, 그리고 계급에 따른 격차를 지울 수 있다. 그렇다, 다른 범주들이 그렇듯 세대 역시도 성찰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등장할 때면, ‘세대’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올해 상반기 최대 이슈 중 하나였던 ‘비트코인’ 현상이 ‘가난한 청년세대의 일탈적 현상’ -한탕주의-로 설명된 것은 대표적 예다.  바야흐로 세대론 10년, 아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88만원‘, ‘N포’, ‘G세대’, ‘달관세대’ 그리고 ‘밀레니얼세대’. 세대론(들)과 이를 향한 비판의 파고가 지나고 10년.  지금 여기서 세대를 말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나. 청년연구소가 돌아왔다. 매주 한 편씩 청년과 관련한 신문기사, 칼럼, 연구, 저작 등을 다뤄보고자 한다. 지난 분기 연재 <청년연구소>의 소개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청년세대론 십 년은 무엇을 남겼고,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것인가? 다시, 공부합시다!

 

멍..멍멍

 

‘니트는 사 입으면 되지만, 니트NEET가 되기 위해선 계급이 필요해

돌아온 청년연구소의 첫 텍스트는 정수남-김정환의 <‘잠재적 청년실업자’들의 방황과 계급적 실천>이다. 해당 논문은 소위 중산층 가정의 NEET로 불리는 청년들에 주목한다. 물론, 울이나 캐시미어는 아니고,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무직자를 가리킨다(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1999년 영국 정부가 발행한 보고서 속에서 처음 등장했다. 교육을 마쳤으며, 일을 하지 않고, 또한 직업 훈련마저 받지 않는 이들을 뜻하며, 2008년 전후로 일본-한국에서는 청년층 내부 무직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어 왔다.

문제는 이같은 ‘니트’ 현상이 세대와 결합하며 생겨난다. 예컨대, 요즘 애들은 일할 의지가 없다는 식의 ‘청년-잉여’ 도식이 있다. 니트가 세대적 현상으로 여겨지면서 세대 내부의 이질성은 간과되곤 하는데, 김정환과 정수남의 연구는 특히 ‘가려지는 계급’에 주목한다. 요컨대,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무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계급적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청년니트론’은 청년 내부의 구직 의지가 없는 자들이 과잉 대표 시킨 뒤, 세대적 현상으로 바꾸어 놓는 이데올로기와 같다.

 

신화와 병리의 바깥

신화와 병리. 청년은 그간 이분화된 도식 속에서만 눈길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한쪽에서 청년은 그들의 가능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을 받았다. 동시에 반대쪽에서는 일탈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괄시를 받아 왔다. ‘청년니트’ 또한 그렇다. 이들은 노동을 거부한 자본주의의 대안적 주체로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교육-취업이라는 규범적 서사에 적응하지 못한 병리적인 존재였다.

정말 니트는 자본주의의 대안적 주체일까? 해당 논문에 따르면, 중산층의 니트 청년들은 취업이라는 문턱을 통과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치관에 있어서는 정확하게 규범적인 것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직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는 눈높이를 낮추면,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현재적 조건은 미취업이라는 항구적 상태보다는 하나의 ‘유예기간’과 같다. 그리고, 이 같은 유예기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중산층’이라는 그들의 계급이다. 규범 바깥의 ‘혁명가’가 아닌 이들은 동시에 환자 또한 아니다. 니트는 완전한 수동적인 주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들은 규범의 바깥에 있는 자신들의 삶을 ‘평범함의 추구’라는 방식으로 전략적 -재서사화한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논문의 서두에서 저자들은 연구의 목적을 “청년세대 내부의 계급적 격차에 따라 그 분파가 다양해지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래, 그래서 청년층 내부의 차이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 움직임은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세대 내부에서 이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히, 해당 논문은 청년 내부 중산층 중 수동-순응적인 모습에 집중했기에, ‘청년운동’적인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지 않나?

다소간의 궁예질이지만, 저자들이 서두에 쓴 문장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짐작해본다.

(동질성을 과장하고 이질성을 은폐하는 세대론은) “세대적 연대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적 분열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면서 이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210p

필연적으로 ‘세대론’이란 특정한 세대의 구성원 내부에서 ‘공유되는 성질’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세대론적 진술은 청년의 ‘동질성’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세대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범주들 역시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특정한 ‘세대론’을 거론하고, 또 비판하는 일은 해당 세대론이 그저 ‘동일성을 과장한다’는 사실 때문 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세대론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통되고 또 해석되는 맥락과 그 효과다. 국가-사회적 위기 담론 속에서 특정 세대를 향한 병리화로 위기를 진단하고, 동시에 그 해결방법을 특정한 세대를 향한 신화화를 통해 제시하는 습관이 고질적이라면, 니트NEET세대는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변주인 셈이다. 

‘누가’가 세대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대를 같다고 말하는가. 일상-미디어-정책의 입안 과정에 이르기까지 세대의 용례는 끝이 없고, <청년연구소>는 이를 다시금 톺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대의 분열을 보는 것”이며, 동시에 “세대적 연대감을 창출”하는 것이다.

 

글.압생트(9fift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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