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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라는 파이, 이제 그만 드세요

작년 한 해는 특히 여성 중심의 미디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를 기다리던 우리는 항상 여성 서사에 목말라 있었다. 여성의 시선이 담긴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도 TV에서나 스크린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것으로 두지 않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가뜩이나 없는 여성 서사의 파이까지 먹어 치우려는 셈이다.

 

꼭 없는 캐릭터까지 만들어야 했나

영화 <땐뽀걸즈> 포스터(좌), 드라마 <땐뽀걸즈> 포스터(우) ⓒKBS, 네이버영화

 

지난달 말에 종영한 KBS 2TV 월화드라마 ‘땐뽀걸즈’(연출 박현석, 극본 권혜지)는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원작이다. 쇠퇴하는 조선업의 도시 거제에서 댄스스포츠를 추는 특성화고 여학생들의 모습을 담았다. 제목에서 알려주듯, 소녀들은 작품의 주인공이자 그 자체다. 이 영화는 여성 영화에 목말랐던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며 CGV 아트하우스가 선정한 올해의 독립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에는 원작에 없던 남성 캐릭터(이하 남캐)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원작 영화를 사랑했던 팬들에게 박현석 PD는 이 혜성같이 등장한 남성 캐릭터는 보조적 인물에 그칠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의 말과는 달리, 당장 인물 정보만 보더라도 새로운 남캐는 한두 명의 여성 캐릭터를 제외하면 땐뽀반 학생들보다 먼저 소개되는 주연급 위치에 있다. 아까 말했듯이 배경이 특성화 ‘여자’ 고등학교다. 그런데도 기어코 남캐를 끼워 넣어 성장스토리까지 만들어 냈다. 여성이 분명히 주가 되는 이야기에 남성이 유입되어 여성의 자리를 가져간 사례다.

거기에 남캐가 여자 주인공(이하 여주)과의 러브라인까지 담당하면서 몇 안 되는 여성 중심 서사로 주목받았던 영화 ‘땐뽀걸즈’의 가치는 드라마화와 함께 춤을 추는 학생들의 흔한 청춘물 정도로 끝나버렸다. 실제로 드라마가 방영된 후에 여주와 남캐의 관계를 조명하는 기사들이 여러 번 쓰였고, 그럴수록 다른 여자 캐릭터들에게 오롯이 돌아가야 했던 스포트라이트는 점점 어두워졌다. 드라마는 호평을 받았으나 없어도 됐을 캐릭터를 만들어 꾸역꾸역 여성 서사의 파이를 가져갔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 주연 한 명으로 끝난 줄 알았어?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이미지 ⓒ네이버 영화

 

최근에는 다양한 장르의 여성 주연 영화들이 줄을 이었다. 한국영화 <영주>, <도어락>, <언니>부터 외국영화 <툴리>,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등 쟁쟁한 작품들이 관객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흥행을 끌어낸 영화는 1997년 IMF 금융위기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이다. 김혜수는 엄청난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주인공 ‘한시현’ 역을 맡았다.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등 명연기로 유명한 남성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이야기는 김혜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제작진은 기획부터 그녀를 주인공으로 점 찍어 두었다. 사실, 그녀의 역할을 남자배우로 바꾸라는 제안들이 있었다. ‘여자가 큰일 하는 영화는 안 팔린다’는 조언들이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요 캐릭터인 ‘윤정학’(유아인 분)은 여자 주연에 비해 작은 역할이라는 이유로 남자 배우들이 출연을 고사하기도 했다. 제작자들의 남성 중심주의는 여성 주연이 한 명인데도 그 캐릭터까지 뺏으려 달려든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과 노력을 알리려는 기획 의도를 가진 작품까지 남자에게 또 공을 돌리려는 현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한 영화는 김혜수 주연이라는 타이틀로 크게 홍보가 이뤄졌지만, 관객들이 기대한 여성 서사는 막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IMF 당시에 가장 먼저 해고를 당하거나 피해를 받았던 집단은 기득권과 떨어져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으로 그려졌다. 얼마나 많은 여성 개개인의 이야기가 삭제되고, 남성으로 대신되었을까. 작품에서 한시현 캐릭터는 거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사실상 이 영화는 여성 서사의 갈증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김혜수 한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녀가 맡은 캐릭터조차 여성보다는 거세된 남성성을 보여주는 것에 가까워 아쉬움을 남겼다.

 

여성의 이야기는 ‘장르’가 아니다

여성 코미디언 이영자 씨가 연예대상을 받고, 영화 <미쓰백>이 흥행을 하고, 드라마 <SKY캐슬>이 연일 화제성을 독차지한다. 시대에 맞춰 변하려는 미디어의 흐름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도 아직 여자가 중심이 되는 콘텐츠는 소수에 그치며 주류 미디어가 아닌 하나의 특별한 장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여성을 주변화하는 사회의 시선은 그대로에 멈춰 있는 것이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단순히 조금 더 많아졌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 몇 명만 내세우면 이제 할 일은 다 했다는 양 포장하는 미디어도 이제는 시대착오적이다. 남성 서사에 끼워 맞춘 여성 주연이 아닌 그 자체로의 여성 서사를 계속해서 요구해야 한다. 그 요구 속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이제 장르가 아니라 점점 일상 속에 늘 존재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여성 서사의 파이를 탐내는 먹보들은 곧 배탈이 날 것이다!

 

글. 채야채(chaeyachae@gmail.com)

특성이미지. ⓒKBS, 네이버영화

채야채
채야채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1 Comment
  1. Avatar
    익명

    2020년 8월 7일 22:10

    잘읽었슺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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