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먹는 놈은 먹기만 하고, 밥하는 사람은 계속 정해져 있다.’ 밥을 먹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밥을 하는 사람도 있을 터, 문제는 둘 사이의 뒤틀린 관계였다. 식재료를 고르고, 구매하고, 손질하고, 요리하여 밥상 위에 올려놓는 일이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이 착취는 어머니의 볼멘소리라는 ‘사적인’ 문제로 취급돼왔다. 하지만 80년대 호황기 이후 한국은 소비사회로 진입했고, 소위 ‘사적 서비스 부문의 확대’가 이뤄진다. 사적인 것이었던 먹는 일이 산업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2010년대, 이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다. 티브이 속의 수많은 ‘셰프’ -외래어지만 이제 누구에게도 생경치 않은 이 단어-에 쏟아지는 선망을 보라. 이제 조리는 기계적인 직무보다는 창의적 작업에, 노동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듯 보인다.

그러나 ‘기계적-직무’로서의 노동과 ‘창의적-작업’으로서의 예술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모르며, 실제로도 둘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예컨대 ‘조리사’와 ‘셰프’가 하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는 사회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추구할 것을 요청하면서도, 빈번하게 ‘창의적 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빌미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리사의 경우 노동시장 진입의 초기에는 ‘주어진 과업’ 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조리 기술을 축적하는 수련’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 점에서 ‘청년기’의 조리사들의 문제는 복잡하고 심화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번 청년연구소에서는 문수연, 손명아, 송리라, 안미선의 2017년 연구 <청년 조리 노동자의 노동 경험에 관한 연구>를 통해 조리사라는 직종의 특수성과 ‘청년’이라는 생애주기가 부딪혀 발생하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노동의 공간, 배움의 공간

이 연구보고서는 (특이하게도) 그 서두에 연구 참여자 A(여성, 양식조리사)의 자기기술지 전문을 싣는다. 여기서 자기기술지란, 연구대상자 본인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놓은 글을 가리킨다.

 

“아침 8시, 힘들게 눈을 떴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새로운 알바 직원을 구하지 못해 주 1회 휴무를 돌린 지 한 달이 넘었다(…) 9시 30분, 조리복을 입고 2평 남짓의 주방에 들어선다. 11시 50분이 되자 점심 손님들이 물밀 듯이 들어온다. (…) 14시, 점심 오더가 마감되었다. 물 한 잔 마시고 아픈 목과 어깨를 잠시 풀어주고 작업대를 정리한 뒤 작은 미장작업, 그리고 생선을 손질한다. (…) 15시,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는다. (…) 밤 9시 라스트 오더까지 마치니 긴장이 풀리고 진이 빠진다. 이제는 주방을 정리한다. (…) 10시가 넘어 불을 끄고 주방을 나선다. (…) 집에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샤워를 끝내니 자정이 다 되었다”

 

A의 하루는 시간은 더 쪼개는 것이 불가할 만큼 빼곡한 과업으로 채워져 있다. 조리사의 노동 강도는 엄청나지만, 작업장에는 마땅한 휴게시설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뜨거운 기름이 튀고 손을 베이는 일의 빈번함 뿐만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시간과 공간적인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조리사는 정신과 육체의 소진을 겪게 된다. 이들이 계속해서 일을 하도록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고된 하루의 끝에서 A의 자기기술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드디어 내일은 수셰프에게 스테이크 고기 손질을 배우기로 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과정, 그러다 보면 내 주방에서 내 요리를 완성해낼 수 있는 셰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몸은 고되고 일상은 불안하지만 이 직업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청년 조리사들의 ‘노동’과 조리 기술을 익히는 ‘배움’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배움’을 ‘기술’로 응축시키는 일은, 사회적 보장이 축소되며 책임은 개인으로 환원되는 시대에서 불안정한 미래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조리사 뿐만 아니라 다수의 ‘청년’들이 노동시장 진입 초기에 이 같은 겪는 과도기적 성격의 노동 형태(인턴/수습/시용 등)에 종사한다. 조리사를 포함한 청년기 과도기 노동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직무와 관련된 교육’이 보장되지 않으며, 교육을 빌미로 한 (교육과 무관한) 과업만이 강제된다는 점이다.

특히 조리사의 경우에는 “고용주의 직접적인 해고 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본인이 원할 시 동일 업장에서 전일제 근무를 지속할 수 있으며, 때문에 스스로를 비정규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조건은 조리사가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 및 요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스스로를 졸라매야 하는 청년 조리사들’

“(…)거기를 배우러 간 게 아니니까 내 할 일을 다 해놓고 내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내 일 다 해놓고 다른 사람 일도 해놓고.” (C, 남, 일식2)

 

논문에 포함된 인터뷰에 따르면 일식 조리사인 C는 고된 환경과 교육 없는 ‘도제식 시스템’에 문제제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휴식시간을 줄여 스스로 교육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택한다. ‘배움’ 없는 도제식 시스템에서 뭐라도 건져내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를 더 졸라매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년 조리 노동자들은 건강과 정신의 소진을 겪게 된다. 하지만 휴무의 사용이 어려운 조리사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자발적 퇴사” 뿐이라고 연구는 말한다. 이렇게 퇴사한 조리사들은 일정 기간의 회복기를 가진 뒤, 다시 구직을 시작한다.

물론, 육체와 정서적 소진이 ‘잦은 이직’에 대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조리사들은 (자발적으로) 한 업장에서 오래 근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경향 또한 있다. 연구는 청년 조리사들이 ‘기술’의 축적을 위해 계속해서 다른 업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들은 자의든 타의든 매우 유연한 노동 환경 속에서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오롯하게 조리사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휴식 시간을 줄이고, 자신의 수면 시간을 줄이고, (자발적으로) 퇴사를 선택하고. 여기서 버티지 못하는 조리사는 역시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일찍부터 노동 경험을 쌓고, 정서와 육체적 소진을 견디며 계속해 조리사로서 생존한다 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이는 ‘계급’ 차원에 있다. 외식산업의 성장과, 조리 산업의 엔터테인먼트화 이후 국내에서 조리노동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중이다. 다수의 대학에서 조리와 관련된 학과들이 창과되었고, 해외의 유명 요리대학들 역시 한국에 캠퍼스를 설립했다. 이 같은 제도화 과정에서 계급적 격차에 따라 소위 ‘출발선’이 달리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연구는 말한다. 열악한 현장에서 버티며 생존하고, 경력이 보증하는 ‘기술’을 축적했더니, 이제 ‘졸업장’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기술보다, 아니 경력이나 노동 경험이 보장하는 상징적인 ‘기술’보다, 이제 유명 조리학교라는 학벌 자본을 통해 보장되는 상징적인 ‘기술’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격차가 만들어지죠. 요리사들은 또 보여주는 게 중요한데 그래서 좋은 학교 나온 걸 많이 따져요. (외국계 조리학교) OO 라는 학교를 나왔다는 우리 사장의 수료증이 걸려 있어요. (…) 우리나라는 어찌 되었든 학력 사회라서 중요한 것 같아요. (나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고요.” (F, 남, 양식15)

 

연구 참여자 F는 조리사로서 그가 쌓은 경력이 해외의 명문 조리학교의 졸업장에 비해 절하되고 있다고 현실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리사’라는 직업이 지닌 불안정성과 유동적 측면이 개개인의 경제적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효과를 내고 있다.

 

멍멍 ⓒ 고함20

 

청년 불안정 노동으로서의 조리노동, 혹은 ‘청년’ 외부로서의 조리노동

해당 연구는 청년기 조리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적으로 ’노동환경 감독‘의 강화와 이들의 장시간 노동이 일으킬 수 있는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에 개입할 것을 요청한다. 조리노동은 하나의 노동 형태이지만, 동시에 그 근로 형태는 소위 ‘청년세대의 과도기적 노동’의 특징들을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노동을 후의 안정된 미래를 위한 ‘예비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현재 스스로가 받아야 할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보장을 유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분명 ‘조리사’라는 직업에서 유래한 특수성들-예컨대 작업장의 이동이라던가, 기술 축적의 중요성 등- 역시도 존재한다. 줄이자면, 해당 연구는 조리노동을 청년세대의 불안정한 노동 중 하나의 것으로서 의미화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그간 청년의 ‘과도기 노동’의 일반적인 특징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여기서 ‘청년 노동’이라는 문제적인 단어를 다시 사고해볼 필요가 생긴다. ‘청년 노동’은 직장도, 근무 형태도 아닌 생애주기에 따라 구분된 노동 형태다. 청년의 노동뿐 아니라, 전 생애주기의 노동이-노동 일반-이 유연화되고, 불안정화되는 현실에서 굳이 ‘청년 노동’에 주목해야 할 필요는 어디서 생길까. 예컨대 젊은 조리사들이 겪는 문제를 ‘조리사 노동자의 문제’임과 동시에 이를 ‘청년기 노동자의 문제‘로 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해당 연구 속에서 조리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의미화하며 끊임없이 ’청년스러운 서사‘를 끌고온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직 성숙 이전의‘, 안정된 성년기 ’미래‘ 이전의 노동으로 자신을 의미화한다. 이는 배움과 노동이 혼재된 노동 형태를 지속시키고 그 안에서 불합리한 처우를 견디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청년기의 수많은 노동 형태들에서 발견되는 배움과 노동의 불편한 동거, 어긋난 맞물림이 여기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조리 노동자들의 ’기술‘이란, 능력주의의 ’능력‘으로,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로 번역 가능할 것이다. 직무, 작업 공간, 노동형태와 조건 등의 차이를 묵과해선 안되겠지만, 이제 서로 다른 청년기의 노동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청년 노동‘이라는 문제의 실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을까. ’기술‘의 축적을 위해 착취적인 작업 환경을 견뎌야 하는, 동시에 계급적 차이(혹은 학벌)로 인해 쌓아온 ’기술‘에 대한 평가를 절하 당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버티지 못한 이들은 오직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는, 오늘 여기의 청년 조리사들이 처한 문제적인 상황을 지속시키는 데에 여전히 ‘세대담론’, ‘청년담론’, ‘청년에 대한 상상’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압선수(9fifty@naver.com)

특성이미지. ⓒ 고함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