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 자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 기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 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고의 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 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동포에게 엎드려 고하오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 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3·1독립선언서’나 ‘2·8독립선언서’의 구절이 아니다. 김마리아 등 8명의 여성이 서명한 ‘대한여자독립선언서’의 일부다.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염원을 담고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선언문이다. 발표 시기만 따지면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3·1독립선언서’보다 먼저지만, 역사 뒤에 묻혀 있다. 비단 선언서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의 기록은 역사에도,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다.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 사진 ⓒ독립기념관

 

백 명, 천 명의 유관순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반의 반쪽’짜리에 머물러 있다. 북측 인사로 규정되는 사회주의 계열을 잘라낸 것이 반이고, 여성 인물에 대한 인지가 부족한 게 반이다. 특히 여성 위인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유관순 열사 한 명에 국한돼있다.

2·8 독립선언서를 한국에 들여온 김마리아,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하고 미주 등지에서 활동했지만 ‘도산 안창호’의 부인으로만 알려진 이혜련,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 혈서를 쓰고 일본 대사 암살 계획을 세우다 투옥된 남자현 등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357명으로 남성(15180명)의 2.35%다. 백 명, 천 명이 넘는 유관순이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는 평평하고 좁다.

 

일제강점기때 노동착취에 반발하며 고공농성을 벌인 강주룡 ⓒ 네이버

 

전쟁터 바깥 또 다른 ‘전쟁터’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가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 특히 전쟁을 다룰 때 여성은 피해자로만 그려진다. 여성의 업적은 ‘부녀자 운동’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전쟁의 수행자를 남성 군인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군사주의적 역사관은 전투할 수 있는 ‘남성’만을 실질적인 국민으로 규정하고, 여성을 피보호자의 영역에 국한한다.

전쟁은 국가의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시스템이다. 인적 자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전쟁은 여성 없이 수행되지 못한다는 소리다. 쉽게 생각하면, 전쟁은 전투지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남성’(실제로 많은 여성이 참여했지만)이 전투를 하는 동안 여성은 국가를 유지한다. 공장과 농토에서 노동해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가계를 유지하는 가장의 역할을 도맡는다. 그렇게나 ‘가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가 전쟁통에 가장의 임무를 수행한 여성의 공로에는 입을 다물고 그저 ‘헌신적인 어머니’로만 회상하는 것이다. 가계와 산업이 없이는 전쟁도, 국가도 유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전선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 어떤 체제도 단 한 가지 영역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특히나 전쟁은 모든 국민의 삶을 관통하고, 착취하는 사건이다. 남성 중심, 전투 중심의 역사관으론 당대의 상황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역사 서술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전쟁에 기여하지 않은 무임승차자이자 피보호자로 전락한다.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열린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스쿨미투 집회 ⓒ고함20

 

지금도 잊히고 있다

언젠가 역사가 될 오늘의 사정은 다를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운동에 낙인을 찍는다. 여성 운동가는 ‘꼴페미’라고 폄하되기 마련이며, 유리천장이나 여성 할당제와 같은 의제들은 제대로 공론화되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전세계적인 흐름에 부응해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꼬집은 ‘미투 운동’의 당사자들 역시 ‘꽃뱀’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자의 시선만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기득권 중심의 사회는 강자만의 역사를 생산한다. 여성의 투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오늘의 사회와 가려진 여성의 역사는 맞닿아 있다. 반쪽짜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역사만 반복될 뿐이다.

 

 

글. 솜(dhstlsajd@gmail.com)

특성 이미지.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