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많은 걸 예견하고 있었다. 섬에 사는 할머니와, 남성들이 만들어 낸 ‘침묵의 카르텔’은 젊은 여성인 복남을 섬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구도였다. 그 속에서 복남은 밤새 마을의 대부분의 남자들로부터 돌려가며 강간을 당했다. 낮에는 온종일 밭일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복남은 자신을 착취하는 섬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집 안엔 자신을 감시하는 남편이 있었다. 섬을 나갈 수 있는 배를 움직이는 건 섬 안의 남편과 관계된 남성들이었다. 사방이 그녀를 막고 있었다.

 

ⓒ Daum 영화

 

‘버닝썬’과 유명 연예인의 단톡방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고 접수를 받고 온 경찰은 일을 조용히 무마시키기 바빴다. 어디선가 젊은 여성은 ‘약물에 취해 눈을 떠 보면 침대였고’ ‘물 좋은 게스트’였다. 이 사실이 지금에서야 알려진 건, 경찰과 클럽 관계자, 그리고 단톡방 속 남자들의 끈끈한 유착 관계 덕분이었다. 경찰은 ‘핸드폰을 복구할 수 없다’고 말했고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의심 또한 지웠다. 영화가 개봉된 9년 후인 지금, 이 영화가 자주 떠오른다. 폐쇄적인 섬으로 드러나는 영화 속 ‘침묵의 카르텔’이 말이다.

 

 

#딸인 연희로 대물림되는 여성성 –‘강남 바닥에서 여자가 예쁘면 서울대생 못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

 

섬은 남성 세계의 ‘침묵의 룰’을 어떻게 이어갔을까. 그건 그릇된 여성성의 대물림을 통해 가능했다. 복남의 딸인 연희가 보고 자란 풍경은 이랬다. 복남이가 아빠에게 맞는 모습, 집안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아빠 앞에서 엄마가 꾸역꾸역 밥을 넘기는 모습. 그래서 연희는 여성으로써 생존할 수 있는 법을 터득했다. 아빠에게 미적으로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아빠가 갖고 있는 남성성의 권력을 잠시라도 빌려 올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해야 엄마처럼 함부로 다뤄지지 않는다.

연희라는 순진무구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하지만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사준 예쁜 팬티, 아빠가 사준 립스틱이 뭘 상징하는지. 그것들은 항간에 떠도는 ‘여성이 예쁘면 고시 삼관왕이다’ 라는 말들과. ‘강남에서 예쁘면 서울대생만큼이나 수준 높은 취급을 받았다는 말들과’ 같았다. 모두 여성의 ‘예쁨’을 일종의 권력으로 보았다. 그 ‘예쁨’에는 성적인 대상화와 평가가 깔려 있었다. 영화 속의 섬 또한 ‘예쁨’을 통해 성적으로 평가 받으려 하는 여성들을 차곡 차곡 만들어갔다. 가슴이 커져야 한다는 사실은 연희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 학습한 것이었다. 엄마인 복남이, 아빠가 연희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연희는 자신의 성기를 가르킨다. 이것이 바로 그 왜곡된 여성성이 엄마에서 딸에게 계승되어 가는 방식이다. 자신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 말이다.

 

영화에서 복남은 하루종일 감자를 캐낸다. 그래도 감자는 마치 없어지지 않을 현상인 것처럼 땅 밖으로 수십 개씩, 또는 수백 개씩 나온다. 복남이 감자 싹을 잘라 없애지 않는 이상 땅 밖으로 나오는 감자 한 알을 먹어 치운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얼른 가슴이 크고 싶다’는 수많은 딸들 또한 ‘왜곡된 여성상’의 싹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이 여성상이 뿌리 뽑히지 않는 이상, 카르텔은 어디서든 또 다시 만들어 질 것이다.

 

 

#남성성이라는 그릇된 믿음과 남성 사회

 

ⓒ 네이버 영화

 

영화는 섬을 관통하고 있는 남성성이 무너져 가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래서 마을엔 남들이 있어야 돼”. 복남에게 살해 당하기 전 시고모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그러나 복남에게 시고모가 죽임을 당할 때 남성은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다. 몇 명은 이미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다. 남성과, 그 남성의 존엄함을 지켜주던 남성성은 복남을 때릴 때, 연희의 몸을 더듬을 때만 발현됐다.

카톡방에서 여성의 몸을 찍어 돌릴 때. 심한 욕설을 할 때. 예쁜 여성과 잤다는 사실을 카톡방에 알릴 때. 남성 사회에서의 연대가 강화됐다. 그 사회를 지키기 위한 연대가 어떤 한 계층에겐 위험하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잔인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서 라도 복남의 복수를 지켜본다. 복남에 의해 섬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과정에 묘한 카타르시스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복남이 살고 있는 섬이. 남성 세계의 ‘침묵의 카르텔’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너무 밝게 뜨자 복남은 홀린듯인 그동안 쌓인 억압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낫을 들어 모두를 죽인다. ‘버닝썬’이라는 해는 떴다. 우리가 들어올린 낫은 감자 알 한 개가 아닌, 감자 싹을 도려내는 방향이어야 하지 않을까.

 

 

#말 할 수 없었던 복남에게서.

 

사회에서 타자화 된 계층은 복남이처럼 ‘말하기’를 거부당한다. 시리아 난민은 자신의 입을 꼬매는 시위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렸다. 섬 속의 복남이도 마찬가지였다. 복남이의 목소리는 매번 전달되지 못했고 ‘모두를 죽이는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어쩌면 모두를 죽이고 만 선택이 복남에게는 영화에서 할 수 있는 선택 중에 가장 기쁜 일이었다. 이는 단순히 여성 뿐만 아니라 사회의 타자화된 계층의 침묵과 체념을 드러낸다.

 

엔딩에서 복남이의 모든 살인이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복남의 친구 해원은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그의 편지들을 처음으로 뜯어본다. 그녀는 물에 젖은 피곤한 몸을 한 채로 방에 누웠다. 그때 해원의 몸 위로 겹친 건 복남이 살던 섬의 모습이었다. 섬의 굴곡을 클로즈업 하자 한 여성이 갖고 있는 몸의 굴곡과 맞아 떨어졌다. 자신의 내면에선 아무 동요도 없었다는 듯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섬은 오랫동안 유지되던 여성의 체념이자 침묵이었다. 영화가 엔딩에 남겨놓은 것은 침묵하는 여성과, 그 침묵을 바탕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섬의 구조다. 그리고 거기엔 ‘이래서 한국 법이 좋다’고 말하는 승리의 한국 사회가 투영돼 있었다.

 

 

글. 흰(aaa341717@naver.com)
특성이미지.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