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비클래스> 커튼콜 ⓒ Luminous Moment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여성 배우 4명이 한 무대에 올랐다. 이날 개막한 연극 <비클래스>는 원래 4명의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이전에는 남성 배우 4명이 올랐던 그 무대에 오른 여성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관객들은 그 어떤 때보다 더욱 큰 박수로 화답했다. ‘연극 뮤지컬 관객 #WITH_YOU’ 집회 이후 꼬박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이전까지는 없었던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여성 배우 극은 안 돼. 아무튼 안 된다니까?

 

연극 <비클래스>는 2017년 초연과 2018년 재연을 거쳐 올해 세 번째 개막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성별 반전, 젠더스왑 캐스팅을 시도했다. 젠더 스왑(성반전 gender swap)이란 한 캐릭터의 성별을 다른 성별로 바꾸는 변형을 말한다. <비클래스>는 대사와 연출 등은 거의 그대로 둔 채 성별만 반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의 우정과 꿈이 전하는 감동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이야기가 여성들의 것이 되었다는 벅차오름이 더해졌다.

 

<비클래스>의 오인하 연출가는 개막 직전 한 토크콘서트에서 여성 배우 버전이 잘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며 꼭 성공하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단순히 여성 배우들이 많이 나오면 흥행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제작이 거절되거나 투자를 받지 못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빈번한 공연계다. 때문에 기존 젠더 스왑 시도들은 일회성의 이벤트로 그치는 일이 많았다. 2017년 뮤지컬 <트레이스유>는 남성 캐릭터 우빈 역에 안유진 배우를 캐스팅 하며 기대를 모은 바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 때 뿐, 제작사는 여성 배우를 다시 캐스팅 하지 않았고 <트레이스유>는 남성 2인극으로 돌아왔다.

 

 

2018년 2월 25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뮤지컬 관객 #WITH_YOU 집회’가 열렸다. ⓒ 여성신문

 

 

잃어버린 세상의 반, 빼앗아간 파이의 반

 

세상의 반은 분명 여성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파이의 반은 여성의 몫일 것이다. 그동안 상업극, 실험극을 막론하고 남성들의 우정과 꿈, 사랑은 다룬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반면 서로 위로하고 함께하고 때론 갈등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성녀, 악녀, 창녀 세 가지의 분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연극과 뮤지컬의 주요 소비자층은 20·30대 여성들이다. 다른 어떤 세대보다 젠더 감수성이 뛰어나며 가장 먼저 변화를 이끌고 있다. 2016년, 가수 이수를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하차시킨 것도 관객들이었다.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던 2018년 2월에는 ‘연극 뮤지컬 관객 #WITH_YOU’ 집회가 열렸다. 어떤 이해타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약 300명의 관객이 사랑하는 공연계를 지키기 위해서 모였다. 많은 남성 배우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자연스레 여성 중심 극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성 관객들의 목소리의 영향으로, 무대 위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비평가>는 젠더 스왑되어 여성 2인극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같은 달에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도 개막했다. 오로지 여성 배우만 10명을 무대에 올린, 이전에 결코 없었던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전회차 전석 매진으로 화답했다. ‘여성 배우로는 안 된다. 어쨌든 안 된다’던 그 헛소리를 보란 듯이 비웃어줬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더뮤지컬

 

 

그런데 있잖아, 그 파이 너희 거 아냐

 

<비클래스>를 비롯해 그 어느 때보다 젠더스왑 공연이 주목받는 2019년 공연계다. 뮤지컬 <더 데빌>에서는 차지연 배우가 처음으로 ‘엑스’ 역을 연기한 여성 배우가 되었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현대 여성으로 재해석한 연극 <함익>이 2016년 초연 이후 3년 만에 돌아왔다. 정동극장의 기획공연 <적벽>은 제갈량, 조자룡, 주유 등의 남성 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

 

물론 다양한 시도들이 나오고 있으나 여성에게 내일이 담보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여성 관객들은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 올라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남성 배우들은 인기를 얻지 못해도 다음을 기약한다. 그런데 여성에게도 그 기약이 주어지냐 하면, 그렇지 않다. 남성 중심의 작품은 안 팔리면 조금 보완해서 또 올린다. 여성 중심의 작품은 안 팔리면 내일이 없다. 업계의 관계자들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성공을 목격하고도 <비클래스>의 여성 버전은 실패할거라고 말했다. 그 말들은 필시 어떤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나온 사고가 아니라, 자신들의 파이가 빼앗기고 있다는 두려움에 기저 한다. 그런데 당신들이 독차지 하고 있는 그 파이 사실 우리 거다. 우리는 아직 반의반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더 많은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

 

남은 과제는 여성을 기본 값으로 만드는 일이다. 남성 배우들만 등장하는 작품은 여전히 대학로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베르나르다 알바>처럼 여성 배우들만 등장하거나 <비클래스>와 같이 젠더 스왑을 시도한 작품들은 대단한 이슈거리가 되곤 한다. 많이 왔지만, 그럼에도 가야할 길이 멀다. 여성 서사는 관객을 위한 이벤트나 제작사들의 생색내기용이 아니다. 남성들은 여성들로부터 빼앗아간 파이를 이제 내놓아야 할 것이다.

 

 

글. 리사 (cherry0226@naver.com)

특성이미지. ⓒLuminous Moment